'부표' 하나에 뒤집혔다…천재 화가의 마법같은 '한방'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3-06-24 08:36   수정 2023-06-24 11:57


타고난 천재와 노력파의 한 판 승부.

1832년 여름, 영국 사교계는 왕립아카데미 여름 전시에서 벌어진 대결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당대 최고의 풍경화가로 꼽히는 두 화가의 신작이 전시장 한 벽에 나란히 걸렸거든요. 화가의 ‘스펙’만 보면 20대 때 이미 왕립아카데미 정회원이 돼 수십년간 영국 최고의 화가로 군림해온 천재,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승리가 유력해 보였습니다. 이에 맞서는 도전자는 노력파 화가 존 컨스터블. 나이는 터너보다 고작 한 살 어렸지만,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는 건 터너보다 27년이나 느렸습니다.


하지만 올해 출품작만 놓고 보면 컨스터블의 승산은 충분했습니다. 그가 올해 내놓은 작품은 13년간이나 심혈을 기울여 그린 ‘워털루 다리의 개통’(첫 그림). 빨간색과 금색 등 다채로운 색상과 생생한 붓놀림으로 개통 축하 행사의 화려함을 표현한 야심작이었습니다. 반면 터너의 그림 ‘헬레부츠라위스’는 옅은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네덜란드 바다의 풍경을 그린 작품. 부드럽고 평온한 분위기의 수작이었지만, 컨스터블의 화려한 그림에 비하면 다소 심심해 보였습니다. 개막 전날 전시장을 미리 둘러본 컨스터블이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띤 채 집으로 돌아간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전시장에 나타난 터너가 ‘마법’을 부리면서 상황이 반전됐습니다. 컨스터블의 그림과 자기 작품을 번갈아 보며 한참 고민하던 터너가, 붓을 들어 붉은 물감으로 동전 하나 크기의 부표를 그리고 떠난 겁니다. 평론가들은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순식간에 그림에 ‘포인트’가 생겨나며 생기가 돌았다. 조화로우면서도 눈길을 끄는 데가 있는 터너의 그림과 비교하면, 이제 컨스터블의 그림은 쓸데없이 복잡하고 허세에 찬 것처럼 보였다.”



개막 직후 전시장을 둘러본 컨스터블은 패배를 직감하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그가 여기에 왔었고…. 총을 한 방 쐈구나.” 요즘 유행어로 하면 ‘무대를 찢었다’는 뜻이겠지요. 슬픈 예감은 맞아떨어져서, 평론가들은 터너의 압승을 선언했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19세기 영국의 양대 풍경화가로 불렸던 이 두 사람의 경쟁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천재 vs 노력파…너무 달랐던 두 화가
터너는 1775년생, 컨스터블은 1776년생입니다. 한 해 터울로 태어난 두 화가지만 기질과 그림 스타일, 커리어와 사생활은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먼저 터너. 그는 런던의 가난한 이발사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10대 때부터 그림을 돈 받고 팔았고, 20대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될 정도로 천재성을 보였지요. 일찌감치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잡았다는 얘기입니다. 이후 그는 자신만의 혁신적인 방식으로 풍경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반면 천재적인 재능에 비해 인간적인 매력은 좀 부족했습니다. 성격이 괴팍했거든요. 또 당시로서는 드물게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컨스터블은 시골 부잣집에서 태어나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업을 물려받으라는 아버지를 설득해 왕립아카데미에 견습생으로 들어간 게 1799년. 터너가 왕립아카데미 준회원으로 선출된 해, 비로소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한 셈입니다. 컨스터블이 처음 그림을 판매(1819년 ‘흰 말’)하고 아카데미 준회원이 되기까지는 그로부터 20년이라는 세월이 더 필요했습니다.

컨스터블은 영국 시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이런 화풍은 당시 미술계의 유행과 잘 맞지 않았기에 작품이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성격은 매력적이었습니다. 사교적이었고 언변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독신이었던 터너와 대조적으로 연애 결혼을 했고 자식도 일곱 명이나 뒀습니다.
무명 화가, 거장의 라이벌이 되다


일찌감치 스타가 된 터너는 무명 화가였던 컨스터블의 존재를 신경 쓸 이유가 없었습니다. 반면 컨스터블은 터너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라이벌로 여겼습니다. 1803년 터너의 전시회가 혹평받았을 때 컨스터블은 뛸 듯이 기뻐했다고 전해집니다. 일개 견습생 입장으로는 주제넘은 생각이었지만, 좋게 보면 그만큼 컨스터블의 승부욕과 야망이 강했다는 뜻으로도 해석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열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된 이듬해(1820년) 아카데미 선배가 이렇게 조언한 건 컨스터블의 마음을 아주 불편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자네도 풍경화를 그리는 사람이니, 터너의 그림 기법을 한번 잘 연구하고 따라 해 보게나.”


공교롭게도 컨스터블의 명성이 먼저 알려진 건 프랑스였습니다. 영국에서 잘 팔리지 않던 작품이 프랑스로 흘러들어가 ‘대박’을 친 겁니다. 외젠 들라크루아를 비롯해 수많은 프랑스 화가들이 컨스터블의 작품에 감명받았고, 작품도 수십장이나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덕분에 영국 미술계에도 컨스터블 작품의 독특한 매력과 가치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829년 컨스터블은 바라고 바라던 왕립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됐습니다. 무명 화가였던 그가 마침내 터너와 경쟁할 만한 지위에 올라선 겁니다.

1831년 컨스터블과 터너의 신경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왕립아카데미에서 여름마다 열리는 전시는 당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행사이자 화가의 한 해 성과를 공개적으로 평가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결과엔 작품이 전시장 어디에 배치되느냐가 큰 영향을 끼쳤고, 정회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심사를 통해 이를 결정했지요. 그 해 위원회는 터너의 ‘칼리굴라의 궁전과 다리’를 가장 좋은 위치에 걸기로 결정했습니다. 컨스터블의 ‘솔즈베리 대성당’은 그 옆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시 직전 컨스터블은 손을 써서 두 작품의 위치를 서로 바꿨고, 이를 안 터너는 격노해 컨스터블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이듬해(1832년)에는 기사 맨 앞에서 언급했던 불꽃 튀는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비록 이 경쟁은 터너의 승리로 마무리됐지만, 컨스터블에게는 저 멀리 앞서가던 라이벌이 손으로 잡아챌 수 있을 것처럼 가까워진 순간이었습니다. 나의 존재조차 몰랐던 거장이 패배가 두려워서 작품을 고친 거니까요.
노력과 사랑으로 따라잡은 천재성
하지만 야속하게도 컨스터블에게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불과 5년 뒤인 1837년, 컨스터블은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반면 터너는 1851년 사망할 때까지 14년이나 더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터너는 그 시간을 미술에 모두 바쳤습니다. 그리고 희대의 천재답게 인류 미술사에서 그 누구도 나아간 적 없던 빛과 인상주의의 세계를 혼자 힘으로 개척했습니다. 이런 업적에 비하면 컨스터블이 이룬 업적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림 실력은 훌륭했지만, 터너처럼 누가 봐도 혁신적인 새로운 그림을 그린 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컨스터블의 그림에는 터너 작품에 없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자연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었습니다. 인간을 좀처럼 그리지 않았던 터너와 달리 컨스터블은 자신의 그림에 사람을 즐겨 그려 넣었습니다. 들판에서 한가롭게 쉬는 여성, 개울에서 물을 마시는 소년 등 그 대상도 다채로웠고요. 사람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저 멀리 날아가는 새, 여러 나무 가운데 홀로 높이 솟은 키 큰 나무, 숲속으로 난 갈림길까지 컨스터블은 풍경의 작은 디테일 하나를 놓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 정확한 표현과 세밀한 묘사는 들라크루아와 제리코, 밀레와 인상파 등 다양한 이들에게 영향을 남겼습니다. 이는 후세 사람들이 컨스터블을 터너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화가로 기억하게 했고요. 터너가 갖고 있는 번뜩이는 천재성과 혁신적인 면모는 다소 부족해도, 주변을 애정어린 눈으로 꼼꼼히 살피는 시선이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린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술평론가 서배스천 스미의 이 말이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컨스터블의 그림을 한 번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과 같거든요. 보면 볼수록 더 많은 걸 볼 수 있습니다.”(Once you really look at a Constable, you can’t leave off. It’s like the face of someone you love. There’s always more to see.)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i>*(참고자료) 'Constable's England'(Graham Reynolds 지음,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전시 간행물), 'Memoirs of the Life of John Constable'(C.R. Leslie 지음), '터너&컨스터블'(정금희 지음, 재원), 'John Constable: A Kingdom of His Own'(Anthony Baily 지음), Tate 홈페이지 'Fire and Water: Turner and Constable in the Royal Academy, 1831' 기사, 워싱턴포스트 'One rivalry changed the landscape in English art' 기사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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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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