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표준의 역습, 국가주의는 위험하다

입력 2023-07-04 17:58   수정 2023-07-05 00:10

나는 교열기자다. 나의 뇌지도에는 전두엽에 <표준국어대사전>이, 측두엽에 ‘한글 맞춤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쓰기와 읽기가 자유롭지 않다. 짜맞춤가구의 장부와 장붓구멍이 꽉 조이게 맞춤하는 글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짜임과 맞춤에는 치수가 있고 형식이 있고 기술이 있다. 교열기자를 옥죄는 짜맞춤은 맞춤법, 정서법이다. 그리고 표준국어대사전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는 민중서림의 <엣센스>를 뒤적였고, 그 뒤로는 <금성판 국어대사전>과 <연세한국어사전>의 팔랑한 종이를 침 묻혀 넘겼다.

1680년 리슐레의 <프랑스어 사전>이 세상에 나온 이래 각국의 모국어 사전 편찬은 사실상 민간 영역이었다. ‘대박’ ‘오빠’ 등이 한국어 발음 그대로 올라간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옥스퍼드대가 발간한다. 일본어 사전 <고지엔>(이와나미쇼텐)과 중국어 사전 <한어대사전>(상무인서관)도 그렇다. <조선말큰사전>은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가 쌓아 올린 금자탑이다.
언어생활 통제하는 표준
언어는 태생이 혼돈의 복잡계다. 여러 층위가 있고 경계도 모호하다. 그래서 쪼개기 좋아하고 호기심 많은 연구자가 규칙을 만든다. 사전은 그 결과물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준’이 붙은 이유가 무엇일까. 1991년 국립국어원이 출범했다. 가장 먼저 사전 편찬에 착수했다. 7년 만인 1999년 한글날 표준국어대사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표준이라는 이름을 앞세우고. 당시 민간 출판사가 활발히 국어사전을 펴냈다는 점에서 국가기관이 선보인 사전은 생경했다. 민간 사전은 이 사전이 나온 뒤 대부분 사라졌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문제점은 다 말하기 뭣하다. 오죽하면 이 사전을 비판한 <미친 국어사전>이 나왔을까 싶다. <오염된 국어사전>도 있다. 이렇게 오류를 지적한 책이 여럿 나온 사전도 찾기 어렵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은 표준이 붙으면서 정부가 인증한 사전이라는 확고한 위상을 차지했다.

이 사전의 가장 큰 문제는 대중의 언어생활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이름에는 다른 의견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엿보인다. 법전도 판사에 따라 해석이 달리 나오는데 표준국어대사전은 얄짤없다. 국어원 사전에 올라 있다는 한마디에 모든 입씨름이 끝난다.
민간에 국어사전 돌려줘야
챗GPT가 등장한 뒤 창조성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인공지능(AI)이 못 하는 생각을 해야 하는 시대다. 창조는 다양성 속에서 통찰이 잉태한다. 사전의 독점과 국가주의는 그래서 위험하다. 사고의 폭과 깊이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사전을 민간에 돌려줘야 한다. 연세대, 고려대를 비롯해 한글학회, 금성출판사 등이 국어사전을 다시 편찬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의 예산 지원은 필수다. 국어원은 민간 투자가 어려운 말뭉치 사업 등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포털에 다양한 국어사전을 탑재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젠 검색으로 사전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사기업이 선의로 탑재할 것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정부가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G8 운운하는 마당에 국어 투자는 당연하지 않은가.

표준만 살고 다양성이 사라지면 도도새처럼 표준도 언젠가 고사할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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