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그림이냐"…공무원 관두고 '올인'했다가 '비난 세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3-08-12 08:06   수정 2023-08-12 08:27




“이게 초상화라고? 머리만 큰 난쟁이 그림이? 내가 그려도 저것보다는 잘 그리겠다.”

18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독립미술가협회 전시. 누군가가 꺼낸 이 말에 전시장은 웃음바다가 됐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림을 본 관객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참가비만 내면 누구나 자유롭게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전시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기괴한 작품은 생전 처음 봤으니까요.

작가 이름은 앙리 루소. 파리 세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주말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전부터 루소의 그림 실력은 조잡하기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끔찍한 건 초상화 실력이었습니다. 그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요령도 당연히 몰랐습니다. 기껏 생각해낸 게 상대방 이목구비의 길이를 잰 다음 그 비례에 맞춰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었는데, 결과물이 이 모양이었습니다. 모델들도 초상화를 보면 질색했습니다. 루소의 친구조차 그림을 받아보고 기분이 나빠서 불태워버렸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이렇게 비웃음을 샀던 루소는 오늘날 미술 거장으로 평가받고, 그의 그림은 명작 취급을 받습니다. 지난 5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그의 풍경화 ‘플라멩코(Les Flamants)’가 치열한 경합 끝에 4354만달러(약 579억원)에 낙찰된 게 단적인 예입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런 거액을 주고서라도 루소의 그림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왜 넘쳐나는 걸까요. 루소의 삶과 작품세계를 통해 그 실마리를 풀어 보겠습니다.
어리숙한 ‘흙수저 독학 화가’
어리숙하고 잘 속는 한심한 사람. 때로는 골치 아픈 사고를 치는 사람. 하지만 왠지 안쓰러워서 챙겨주고 싶은 사람. 어느 집단이든 이런 사람이 한 명쯤은 있습니다. 루소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루소의 인생이 처음 꼬이기 시작한 건 아홉 살 때. 멀쩡히 돈 잘 벌던 아버지가 빚을 내서 ‘영끌 투자’를 했다가 처참하게 실패한 게 계기였습니다. 가족은 알거지가 됐습니다. 어린 루소도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두 번째는 열아홉 살 때였습니다. 루소가 순간의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직장에서 푼돈을 훔치다가 적발된 겁니다. 재판에 넘겨진 그는 곧바로 입대 신청서를 냈습니다. 군복을 입고 재판에 출석하면 판사가 자신을 건실한 청년이라고 생각해 선처해줄 거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쓸데없는 짓이었습니다. 감옥은 감옥대로 갔다 오고, 괜히 군 복무만 4년이나 해야 했습니다.

제대 후 루소는 세관원으로 취업했습니다. 세관원 일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박봉이었고, 근무 시간이 1주일에 70시간을 넘었습니다. 종일 일하고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아 입에 간신히 풀칠만 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런 루소의 삶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그림이었습니다. 근처에 살던 유명 화가 오귀스트 클레망이 “그림을 잘 그리면 성공할 수 있다”고 지나가듯 말해준 게 계기가 됐습니다.



휴일이면 루소는 혼자 파리의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벽에 걸린 작품들을 베껴 그리며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위대한 화가가 돼서 부와 명성을 거머쥐겠다는 게 루소의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술관에 걸린 명화들처럼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이 직접 관찰한 것들을 꼼꼼하게 묘사하고 색칠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루소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작품을 처음 선보인 건 1886년 8월 18일. 파리 우체국 본부 임시 전시장에서 열린 독립미술가협회의 전시에서 그의 작품은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요. 관객들은 그의 그림 앞에 멈춰서서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습니다. 한 언론은 그의 작품을 두고 이렇게 평했습니다. “루소는 눈을 감고 발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꿋꿋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기 작품을 직접 손수레에 싣고 돌아다니며 팔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비웃음도, 가난도, 아내와 아이 네 명을 결핵으로 먼저 떠나보낸 것도 그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세관원을 때려치우고 전업 화가로 살겠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나이 49세 때였습니다.
공무원 때려치우고 화가 됐지만
미술계의 벽은 높았습니다. 동료 화가와 평론가들은 그를 무시했습니다. 전시의 품격이 떨어진다며 루소의 작품을 걸어주지 않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사실 루소의 그림 실력이 시원찮긴 했습니다. 손가락을 잘 못 그려서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했고, 발가락을 제대로 그릴 줄 몰라서 일부러 등장인물들을 수풀 속에 세우기도 했습니다.


대중도 그의 그림을 외면했습니다. 그림이 잘 팔리지 않은 탓에 루소는 지긋지긋한 가난에 계속 시달렸습니다. 미술용품을 사고 나면 밥을 굶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집은 원룸이었고, 그마저도 더 싼 곳을 찾아 계속 이사해야 했습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루소는 노인과 아이들에게 그림과 음악 과외를 하고, 길거리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루소는 허세를 부렸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멕시코에 파병돼서 호랑이를 봤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유명한 사람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당신은 그림을 그려야 하는 사람”이라고 하길래 화가가 되기로 했다…. 루소가 늘 하던 이 얘기들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루소는 훌륭한 교육자들이 받는 훈장(Ordre des Palmes academiques)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는 동명이인인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훈장을 정부의 착오로 잘못 받은 것이었습니다. 루소에게 내려진 훈장도 곧 취소됐습니다. 하지만 루소는 평생 이 훈장을 상징하는 작은 보라색 장미꽃을 자랑스레 옷깃에 달고 다녔습니다.

아마도 루소의 이런 거짓말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비참한 현실을 견디기 위한 수단이었을 겁니다. 자신이 지어낸 말을 스스로 믿는 어린아이처럼, 루소 역시 자신의 거짓말을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건 루소가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붓을 놓지 않았다는 겁니다.
마침내 인정받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마침내 루소의 진가를 알아보는 눈 밝은 사람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와 폴 고갱입니다. “진실이 있어. 미래가 있다고! 바로 여기에 회화의 진수가 있어!” 고갱은 1905년 루소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감탄했다고 합니다.


프랑스가 번영(벨 에포크)을 구가하고 새로운 시도를 장려하는 분위기가 확산하면서 루소를 인정하는 사람은 갈수록 늘었습니다. “저 사람, 바보 같은 면이 있긴 해도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대단해.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꿋꿋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방식을 지키면서 그림을 그리잖아.” 루소의 그림 실력이 갈수록 더 좋아진 것도 여론이 좋아지는 데 한몫했습니다. 특히 정글 그림은 미술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비록 그가 한 번도 정글에 간 적이 없긴 했지만요.

그의 팬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피카소였습니다. 피카소는 루소의 작품에 푹 빠져서 그림도 몇 점 사 주고, 루소를 위한 파티도 열어줬습니다. 이 파티에서 한껏 신난 루소는 자신이 창작한 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피카소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화가는 나와 당신이야. 나는 미술 전체에서, 당신은 이집트 미술에서.” 당시 피카소 그림이 고대 이집트 양식과 약간 비슷하다는 뜻에서 한 얘긴데요, 이 말에는 피카소가 자신보다 한 수 아래라는 생각도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루소의 순진하고 어리숙한 성격을 아는 피카소는 이 말을 유쾌하게 웃어넘겼다고 합니다.


미술계의 인정을 받으면서 그림 주문도 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루소의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현실 감각도, 장사 수완도 워낙 부족했거든요. 옛날에 가르쳤던 제자에게 명의를 빌려줬다가 일종의 대포통장 사기를 당한 뒤 죄를 뒤집어쓰고 법정에 선 일도 있었습니다. 변호인이 최종 변론에서 한 말은 “부디 이 순진한 예술가를 살려주세요”. 그 와중에 루소는 또 눈치 없이 큰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내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나 뿐 아니라 예술 그 자체에 불행한 일이 될 겁니다!” 무죄로 풀려난 게 천만다행이지요.

그의 최후는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작업에 몰두하던 루소는 다리에 난 상처가 덧났고, 패혈증에 걸려 손써볼 틈도 없이 1910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사가 진단한 그의 병명은 알코올 중독. 초라한 옷차림으로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고 잘못 내린 진단이었습니다. 루소의 유해는 빈민들이 묻히는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행복과 순수의 나라로
안타까운 최후였습니다. 루소의 작품세계를 본격 조명하는 전시들이 줄줄이 예정돼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랬습니다. 루소가 세상을 떠난 그해 뉴욕 전시에서 그의 작품이 미국 관객들에게 처음 소개됐고, 그 뒤로도 의미 있는 전시가 이어졌습니다. 루소에 대한 책들도 출판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루소의 삶과 작품을 접한 예술가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그림은 처음 본다. 단순하다. 이국적이다. 어린아이 같다. 아무튼 이상하다. 그리고… 매력적이다.” 이들은 그 ‘이상한 매력’의 비밀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가 그랬고, 르네 마그리트를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루소는 기나긴 미술의 역사 속에서도 가장 특이한 거장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인간 본연의 예술성을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소박파’의 거장으로 말입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못 배운데다 어리숙하기까지 했지만, 루소는 실낱같은 기회를 잡아내 ‘위대한 화가’라는 꿈을 이뤘습니다. 이는 루소의 놀라운 끈기와 순수한 열정 덕분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루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상 속 행복한 세상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그 열망은 정말로 거대했습니다. 100년 넘는 세월과 국경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에게도 모두 보일 정도로요. 서툴지만 이상하게 매력적인 색과 모양의 그림이,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펼쳐낸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가, 말을 더듬거리면서도 자신이 받은 감동을 열심히 전하려는 천진난만한 소년, 루소의 모습이.


<i>*이번 기사는 뉴욕 MoMA의 1985년 전시 도록 ‘Henri Rousseau’, ‘앙리 루소’(코르넬리아 슈타베노프 지음, 이영주 옮김, 마로니에북스-타셴), ‘앙리 루소’(재원)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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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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