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中 원단 공세…'벼랑 끝' 화장지업계

입력 2023-08-21 17:58   수정 2023-08-22 01:04


“이대로 가면 다 죽습니다.” 지난 18일 전북 군산 본사에서 만난 김동구 대왕페이퍼 대표는 국내 화장지 원단(원지) 제조업계가 고사 위기에 몰렸다고 하소연했다. 대왕페이퍼는 1987년 설립해 화장지 원단 제조 외길을 걸어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명절을 제외하고 휴일 없이 매일 24시간 공장을 돌린 대왕페이퍼는 올 들어 한 달에 열흘은 쉬고 있다. 신창제지와 대원제지 등 다른 중소 화장지 원단 제조회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저가의 동남아시아산, 중국산이 ‘반제품’ 형태로 국내에 들어오면서 국내 화장지 가공업체가 국산 원단을 받는 횟수가 현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국내 화장지업계는 크게 원단 제조사와 가공 업체로 나뉜다. 펄프를 직접 들여와 화장지 원단을 만드는 기업은 국내 11개사뿐이다. 하지만 가공업체는 원단을 어디서든 받은 뒤 규격에 맞게 자르고 지관을 넣어 완제품을 생산하는 비교적 쉬운 공정이어서 국내 200여 개사가 난립해 있다.

제지업계에선 인도네시아산과 중국산 원단이 국내에 들어와 가공업체 가공만 한 번 거친 뒤 ‘국산’으로 둔갑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장지가 대형 유통사인 쿠팡, 이마트 자체 브랜드(PB)로 팔리기 때문이다. 대형유통 A사에서 화장지 최대판매 상품인 ‘A베이직 네추럴 천연펄프 롤화장지’는 글로벌 제지기업인 APP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생산한 원단을 쓴다. APP 한국법인인 GUTK가 수입해 국내 가공업체 모나리자SM에 맡겨 A사 이름을 달고 판매되고 있다.

국산·외국산 원단으로 만든 화장지가 모두 ‘대한민국산’으로 팔리는 이유는 부실한 원산지 표기법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국내 화장지 원산지 표기는 가공제조원만 표시한다. 이 틈을 APP와 중국 헹안제지 등이 파고들었고, 원단만 국내 가공업체에 보내 ‘한국산’ 타이틀을 얻게 됐다. 김 대표는 “화장지 제조원가의 60~65%는 주원료인 원단”이라며 “나머지는 지관과 비닐팩, 가공 인건비와 물류비로 이뤄지는데 원단을 자르고 지관을 꼈다고 국산으로 둔갑하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더 큰 문제는 외국산 원단이 저가로 들어와 국내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지업계에 따르면 수입 업자들이 APP 등의 원단을 국산보다 20~25% 저렴한 가격으로 가공업체에 팔고 있다. 무역협회 통계를 보면 2010년 8000t에 불과했던 화장지 원단 수입량은 지난해 11만t으로 14배 가까이 증가했다. 올해 1~6월 전년 동기 대비 32% 증가한 약 7만5000t이 수입됐다.

국내 화장지 및 물티슈 시장은 1조5000억원 규모다. 국내 화장지 원단 제조 업계가 경쟁력 저하로 사업을 중단하면 결국 그 타격은 소비자가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처럼 펄프 가격이 급등하면 공급량이 부족해 특정국에는 원단을 납품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 쉬워서다.

국산 원단은 화학약품 하나를 쓰더라도 환경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의 엄격한 검사를 거치는 반면 외국산 원단은 이 과정이 생략되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김형진 국민대 임산생명공학과 교수는 “위생용지는 국민 생활과 밀접한 만큼 농산물처럼 원산지 표시제를 적용하는 등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군산=최형창 기자 call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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