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셰프'가 요리한 210분짜리 '건강식 음악'

입력 2023-10-04 18:17   수정 2023-10-05 00:31


“오늘 브람스를 칠까 했는데, 지금 보니 이 피아노와 이 홀에선 모차르트를 치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지난 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안드라스 쉬프(70)의 내한 리사이틀. 클래식계에서 드물게 ‘경’(sir)이란 호칭이 붙는 고희(古稀)의 피아니스트는 이렇게 연주할 곡을 그 자리에서 정했다. 그는 ‘맡김차림’(오마카세)을 선보이는 연주자로 유명하다. 프로그램을 미리 공개하지 않고 연주회장에서 즉흥적으로 고르기 때문이다. 이번 내한 리사이틀에서도 그랬다.

느릿한 걸음으로 무대에 등장한 쉬프는 자신이 칠 곡과 곡 설명을 덧붙이며 210여 분간 강연을 겸한 콘서트를 펼쳤다. 오늘의 스페셜 요리는 뭔지, 제철 음식은 뭐가 좋은지, 음식에 관한 에피소드는 어떤 게 있는지….

스토리를 곁들여 음식 맛을 끌어올리는 유쾌한 셰프처럼 이날 쉬프는 풍부한 얘깃거리를 덧붙이며 코스요리 같은 연주를 이어갔다. 훌륭한 조수 군단도 함께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명기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사용했고, 이번 내한에도 평소처럼 자신의 전속 조율사를 대동했다고 한다. 통역은 피아니스트 문지영 씨가 맡았다.

쉬프는 듣던 대로 ‘바흐 맛집’이었다. 바흐 음반으로 그래미상을 받은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1·2부 모두 바흐의 곡이 빠지지 않았다. 그는 “바흐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말했다. 쉬프의 바흐는 어느 연주자보다 구조적으로 촘촘하고 기본에 충실했다. 그의 이름 앞에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 ‘피아노의 교과서’란 별명이 붙은 이유다.

첫 곡은 바흐 평균율 피아노곡집 1권의 1번 전주곡과 푸가(하나의 주제 선율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여러 성부에서 모방되며 진행되는 다성음악)였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C장조 전주곡과 푸가 세트는 그야말로 기본기의 정수였다. 바흐로 이렇게 다채로운 요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1부는 바흐 모차르트 하이든 슈만으로 이어졌다. 그는 크고 화려한 소리보다는 숨이 멎을 듯 고요하고 시적인 음악에 특화한 연주자다. 연주는 즉흥적으로 보였지만, 그 소리는 극도로 정제돼 있었다.

슈만의 다비드 동맹 무곡은 여유로웠다. 슈만 작품 중에는 요즘 말로 ‘인싸’(인사이더)인 플로레스탄과 ‘아싸’(아웃사이더)인 오이제비우스라는 두 캐릭터가 대조적으로 등장하는데, 쉬프는 이를 부각하기보다는 슈만의 풍부한 상상력과 다채로운 감정 표현에 초점을 맞추는 듯했다. 동화처럼 맑게 노래하는 부분에서는 탄성이 나올 만큼 여리고 순진무구했다. 다만 산뜻하고 촘촘한 연주 스타일로 인해 젊은 슈만의 뜨거운 면은 덜 부각된 측면이 있다.

2부는 ‘d단조 스페셜’ 요리였다. d단조 조성으로 된 바흐의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 베토벤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를 이어 연주했다. 그는 d단조를 ‘브론즈색 같다’고 했는데, 베토벤 템페스트에서 그 색채를 여실히 드러냈다.

템페스트 소나타 1악장에는 페달을 길게 끌며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단선율로 노래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이 부분에서 그는 음과 음 사이의 긴장감을 세련되게 통제하고 초현실적인 음색으로 노래하며 청중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이어 대부분 연주자가 빠르고 격정적으로 연주하는 3악장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연주했다. 그는 “3악장은 ‘조금 빠르게’라고 적혀 있다. (다른 연주자처럼) 빠르게 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중간중간 마이크를 잡고 옛날이야기를 하듯 강의했다. ‘바흐는 과학자와 예술가가 결합한 인물’ ‘하이든은 저평가된 작곡가’ 등 자신만의 정의를 내렸다. 멘델스존을 이야기하면서 “(멘델스존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바그너가 그를 평가절하했다. 나도 유대인이라 바그너가 싫다. 그는 천재지만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농을 치기도 했다.

쉬프는 인심 좋은 셰프였다. 본 공연을 2시간 넘게 했는데도 앙코르로 연속 4곡을 내리 연주하고서야 물러났다.

이날 공연은 천천히 음미하고, 느리게 소화하는 ‘건강식’ 같은 연주였다. 작품이나 작곡가에 대한 강의는 일반 청중이 듣기엔 난도가 있는 편이었다. 프로그램도 대체로 재미보다는 음악사적인 의미에 방점을 둔 곡들이었다. 그만큼 지적이고 가치 있지만 대중적인 즐거움은 덜한 연주였다. ‘몸에 좋은 음식은 입에 쓰다’는 속담처럼 ‘좋은 음악은 귀에 쓰다’는 말이 어울리는 210분이었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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