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와 먹의 화가들, 230년 전통 英 경매사와 파리지앵 홀리다

입력 2023-10-26 18:33   수정 2023-10-27 01:57


영국 런던의 ‘최고 부촌’ 메이페어 뉴 본드 스트리트. 이곳을 걷다 보면 ‘본햄스’라고 적힌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서면 자동문이 열리면서 화려한 꽃과 식물로 장식한 입구가 나타난다. 정글 같은 통로를 지나면 르누아르 등 옛 거장부터 트레이시 에민 등 동시대 인기 작가들의 작품이 보인다. 전 세계 22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 글로벌 경매사 본햄스의 전시장. 230년 전통의 본햄스가 이달 7~13일 런던의 중심에서 한국 작가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것도 영국 미술계의 최대 행사인 ‘프리즈 런던’이 열리는 기간에, VIP에게만 문을 여는 ‘프라이빗 전시장’에서다. 본햄스에서 한국 작가의 전시가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 주인공은 혜명 김성희(60)다. 서울대 동양화가 교수인 김 작가는 서울대미술관장, 서울대 미대 학장 등을 역임했지만 본업은 ‘예술가’다. 혜명은 그의 호다. 본햄스 전시장에서 만난 그에게 소감을 묻자 수줍은 미소와 함께 돌아온 말. “정말 꿈만 같은 일이죠. 동시에 한국 미술을 세계 무대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될 거라 생각하니 어깨가 무거워요.”

이번 전시는 우연히 이뤄졌다. 평소 김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던 영국인 컬렉터가 본햄스에 김 작가의 작품을 보여준 것. 아시아 미술에 관심이 있던 본햄스는 김 작가에게 작품 실물을 보내달라고 했다. 작품을 보내고 얼마 안 돼 본햄스에서 연락이 왔다. 모든 비용을 다 댈 테니 전시를 열자고 했다.

본햄스를 사로잡은 건 ‘별자리’였다. 김 작가는 한지에 먹과 천연염료로 별을 만들고, 선을 그어 이들을 잇는다. 한지를 밤하늘 삼아 만들어진 별무리는 때로는 사람이 되고, 때로는 새와 나무가 된다.


“별자리 연작은 10여 년 전 제가 다치면서 시작됐어요. 그 전엔 앞만 보고 달렸죠. 하루에 3시간도 못 잘 정도로요. 그러다 어느 날 오토바이 사고로 3개월간 병상에만 누워 있게 되면서 깨달았어요. 인간의 욕망이 마치 별과 같다는 것을요.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별처럼 욕망은 덧없기도 하지만, 그걸 원동력 삼아 인간은 선(線)처럼 나아가잖아요.”

김 작가는 현대인의 욕망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풀어냈다. 작품에 쓰이는 염료는 자연에서 채취한 열매와 나무껍질로 만든다. 일반 한지가 아니라 전통적 기법으로 만든 한지를 쓴다. “천연재료를 선택한 건 자연의 순환이라는 제 철학과 맞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지 위 거대한 파도 일으킨 이현정…보석 디자이너로 일하다 '늦깎이 데뷔'
닥나무 종이 직접 삶고 찐 이후에 붓칠…파도나 산 같지만, 길 떠올리며 작업

태어난 곳을 떠나 낯선 땅에 오래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하는 고민이 있다.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1995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이현정 작가(51)는 ‘한지’에서 그 답을 찾았다. 닥나무 종이를 수시간씩 삶고 찐 뒤 얇게 펴서 만든 가장 한국적인 재료, 한지. 이 작가는 그 위에 세필로 섬세하게 선을 그려낸다.

그는 이런 작품으로 요즘 여러 아트페어에서 주목받고 있다. 4월 화랑미술제, 5월 아트부산, 7월 도쿄겐다이, 9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서 작품이 모두 ‘완판’됐다. 최근 파리에서 열린 ‘아시아 나우’에서도 그의 작품은 인기였다.


최근 파리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파란색 문을 두드리자 거실 옆 작은 작업실에서 한창 작업 중이던 그가 환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어떻게 작품을 시작했는지’를 묻자, 그는 “잠깐만요” 하더니 작은 상자를 갖고 왔다. 은과 진주로 만든 브로치와 목걸이였다. “한국에서 미대를 나온 뒤 무작정 파리로 왔어요.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생계를 위해 선택한 게 보석 디자인이었죠. 보석 회사에 들어가서 디자이너로 수년간 일했어요. 거기서 전시도 열고, 나름 인정받았어요. 하하.”

돌고 돌아 그림이었다. 보석 공예도 즐거웠지만 마음속 깊은 곳엔 그림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거기에 불을 붙인 건 2013년 팔레 드 도쿄에서 열린 보석 공예 전시였다. “집에서 혼자 그린 작은 그림을 보석 작품 옆에 걸어뒀는데, 여성 세 분이 오더니 그림을 사겠다고 하더라고요. 내 그림도 팔릴 수 있구나. 그때 용기를 얻었어요.” 결국 이 작가는 회사를 그만두고 붓을 들었다. 마흔한 살 때의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거대한 파도 같기도, 산 같기도 하다. 해석은 관람객 몫이라지만, 그가 처음에 마음속에 떠올린 건 ‘길’이었다고 했다. 그가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며 걸어온 길, 그러다 용기를 얻고 마침내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 인생의 길이다. ‘늦깎이 데뷔’였지만, 세련된 작품에 많은 갤러리가 ‘러브콜’을 보냈다. 벌써 프랑스 벨기에 독일 룩셈부르크 싱가포르 등 5개 갤러리와 일하고 있다. 28일 경기 판교 더컬럼스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이 끝나면, 내년 초 싱가포르에서 개인전도 연다.

“제 작품이 사랑받는 건 제가 돌고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긴 고민 끝에 그린 그림이기에 인생이 묻어 있거든요.”

파리=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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