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집안에 가만히 앉아 떠나보는 '고전 세계일주'

입력 2023-10-27 18:05   수정 2023-10-28 00:18


어떤 책은 인생을 바꿔놓는다. 대학 신입생이던 한 남자는 가을밤 열리는 공연 오디션에 참가하기 전 망설인다. 교수가 다음날 강의를 위해 플라톤의 <국가>를 미리 살펴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책을 이미 읽어둔 그는 오디션에 가기로 한다. 그리고 오디션장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될 한 여자를 만난다.

데이비드 댐로쉬 미국 하버드대 비교문학 교수는 위대한 책을 주제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이런 자기 경험을 들려준다. 그는 “한 권의 책이 언제 우리의 인생을 바꿀 경험을 만들어 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순간, 고리타분하게 여겼던 고전이 일상 속으로 들어온다.

공감과 집중을 이끌어내는 설명 덕분에 댐로쉬 교수가 맡은 ‘세계문학 걸작’ 온라인 강의는 지금껏 10만 명이 들었을 정도로 학교 안팎에서 인기를 끌었다. 최근 국내 출간된 <80권의 세계 일주>는 댐로쉬 교수가 이 강의와 연구를 토대로 집필한 책이다. 하버드대 인기 강의를 각자 편한 시간과 공간에서 원하는 속도로 만날 수 있는 셈이다.

여행의 재미도 더했다. 책 제목은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 파리의 카페에 앉아 세계 곳곳을 누비는 소설을 쓴 베른처럼, 댐로쉬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집안에서 책을 통해 세계 곳곳을 탐험할 방법을 고안해냈다.

<80권의 세계 일주>는 동서양 걸작 80권을 누빈다. 런던, 파리, 콩고 등 16개 지역별로 작품 5권씩을 다뤘다. 1장 ‘런던’에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등을 소개한다. 고전뿐 아니라 마거릿 애트우드, 살만 루슈디, 줌파 라히리 등 현대 작가의 작품도 망라한다.

단순히 문학 작품을 요약하거나 작품의 지리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생애, 흥미로운 일화가 녹아든다. 예컨대 울프는 제국주의 영국에서 페미니스트이자 평화주의자로 살았다. 그의 엉뚱한 전복과 일탈은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1910년 울프는 남장을 하고 오빠 에이드리언과 몇몇 친구와 함께 에티오피아 왕족 행세를 하며 포츠머스에 정박한 전함을 공식 방문했다. 의장대의 환영을 받으며 전함을 견학한 이들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의미 없는 헛소리를 주고받고, 가짜 훈장을 수여한 뒤 런던으로 돌아왔다. ‘데일리 미러’ 신문에 사기극과 사진을 싣자 영국 해군은 발칵 뒤집혔다. 책에는 ‘울프와 사기꾼들’의 사진도 실려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다룬 7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원서가 쓰인 2021년에는 미처 알지 못했겠지만, 이 지역은 현재 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다. 책은 히브리 성서, 신약 성서와 더불어 D A 미샤니의 <사라진 파일> 등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학 작품을 소개한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갈등의 뿌리를 접할 수 있다. 댐로쉬 교수가 강연을 위해 예루살렘에 갔을 때, 유독 큰 부지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택시 기사에게 이유를 물었다. 택시 기사는 “이 땅은 곳곳이 피로 뒤덮여 있습니다”고 답한다. 댐로쉬 교수는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고 필요한 것 같지도 않았다”고 썼다.

작품 안팎을 넘나드는 깊이 있는 해설 덕에 두꺼운 책인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다. 그러나 <80권의 세계 일주>는 어디까지나 ‘책 가이드북’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진정한 여행은 결국 책에 소개된 작품들을 직접 읽을 때 시작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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