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의 임신 때문에 왜 나만 피해봐야 해"…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

입력 2023-11-08 08:54   수정 2023-11-15 12:00



"이놈의 임신 때문에 원래 실력은 온데간데 없어. 나만 왜 이렇게 피해 봐야해. 내 인생은 이제 시작인데…."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후반부. 주목받는 신인 작가 '재이'와 남자친구 '건우'의 갈등이 극에 달한 롱테이크 장면이다. 비혼·비출산 커플인 둘의 관계는 계획에 없던 아이가 들어서며 틀어진다. 임신한 연인을 수개월째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던 건우도 참지 못하고 폭발한다. "너만 시작이야? 나도 시작이야."



15일 개봉하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출산과 육아에 대한 사회의 여러 단면을 있는 그대로 그린 '하이퍼 리얼리즘' 영화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시민평론상을 받았다. 마리끌레르영화제,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 초청돼 "고전적인 가족 패턴을 따르도록 강요받는 여성을 예리하게 관찰한다"(파리한국영화제)는 평가를 받았다.

유지영 감독(39)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장편 데뷔작 '수성못'(2018)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방황하는 20대를 다뤘다면, 이번 작품은 출산과 경력단절, 비혼주의를 둘러싼 30대의 고민을 포착했다. 유 감독의 실제 경험이 반영됐다. 감독은 "상처투성이 과거에 대한 반성이자 서늘한 성장담"이라고 설명했다.



한해인 배우가 연기한 여주인공 재이는 이기적인 캐릭터다. 남자친구의 만류에도 낙태를 고민한다. 자기 원고가 주목받지 못한 것을 아이 탓으로 돌린다. 글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술독에 빠져 살기도 한다. 배 속의 아이를 걱정하는 주변의 시선에는 이렇게 반문한다.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한다는데, 좀 이기적이면 안 되나."

재이와 평행선을 달리는 인물이 남자친구 건우(이한주 분)다. 그는 자기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연인과 미래의 아이를 책임지고자 한다. 글을 쓰는 여자친구를 위해 생활비를 마련하고, 임신 사실을 알고부터는 집안일을 도맡는다. 자기를 부품처럼 취급하는 상사한테도 한마디 불평 없이 일한다.



작품 초반이 임신으로 인한 재이의 고뇌를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중반부터는 건우의 서사에 집중한다. 여기가 영화의 특별한 대목이다. 특정 견해에 치중하기보단 출산과 가족관을 둘러싼 사회의 여러 입장을 고루 묘사한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라는 제목도 생각할 거리를 안긴다. 고(故) 정미경 작가의 단편소설 제목이자, 정 작가의 남편인 김병종 화백이 아내를 그리며 쓴 추모글의 제목에서 따왔다. 영화 초반에 재이의 착상혈을 화면에 담으며 그가 '피투성이 연인'임을 암시한다. 작품을 보다 보면 알게 된다. 평범한 가정을 일구기 위해 분투하는 건우 역시 만만치 않은 시간을 보내며 '피투성이'가 됐다는 사실을.



영원히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한테 방법은 없을까. 재이의 조력자로 등장하는 민유정 교수의 대사가 힌트다. "엄마가 됐다고 글을 못 쓸 사람이면, 꼭 아이가 아니더라도 그만두지 않을까요. 한참 시간이 흐르고 보면 인생의 수많은 순간 중 하나일 뿐이죠. 다만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내가 임산부, 엄마이기 전에 작가란 사실을 잊지 말아요."

2시간 30분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 단 한 차례도 배경음악이 나오지 않는다. 일상적인 소음과 인물들 간의 대사가 영화를 가득 채운다. 작품은 남자친구를 떠나 보내고 아이를 유산한 재이가 새로운 원고를 쓰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합계출산율 0.7명' '경단녀(경력단절 여성)' 등이 회자하는 요즘, 서걱거리는 연필 소리가 안타까운 여운을 남긴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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