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정지돈’이 내 인생으로 들어왔다 [인생 1회차, 낯설게 하기]

입력 2023-11-03 12:03   수정 2023-11-10 12:19

“덕통사고”라는 말이 있다. 좋아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갑자기 우상처럼 좋아하고 찾아보게 되는 현상을 이 단어만큼 강렬하게 표현한 말도 찾기 어렵다. 덕통사고는 팬으로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덕질’과 ‘교통사고’가 합쳐진 합성어다.

불시에 교통사고를 당하듯 누군가에게 빠져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치 번개처럼. 왜 하필 교통사고를 이미지로 사용했을지는 의문이다. 덕질이라는 말은 일본어 ‘오타쿠’에서 시작했다. 누군가 오타쿠를 오덕후로 발음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파생어를 남기며 미화되고 일상어로 자리 잡았다.




내게는 어느 날 ‘정지돈’이라는 이름이 인생에 들어왔다. 정지돈은 소설가로, 2013년 등단해 도시, 인간, 산책, 미래 등 다양한 담론에 대해 찾고 그걸 이야기로 만들어 다양한 연재와 책을 내고 있다.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알게 된 건 다른 책을 샀다가 사은품으로 함께 온 한 장짜리 단편이었다. 그때는 ‘신기하다, 이렇게 깨알 같은 글씨로 한 장짜리 소설을 낼 생각을 했다니!’라고 생각할 뿐 읽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그게 그의 등단작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묘하게도 시간이 흘러 알파 세대들은 글이 아닌 영상으로 정보를 습득한다더라, 하는 괴담이 돌던 시기 정지돈 작가를 유튜브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나는 그 즉시 그의 덕후가 되었다.

자신의 소지품을 소개하는 영상에서 그는 끊임없이 ‘그럴 수도 있고, 물론 아닐 수도 있고’의 늪에 빠진다. 영상 매체는 처음인 탓에 긴장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도 영상 말미에 이런 자신의 모습은 다 잊어달라고 하지만 나는 확신이 없는 그의 모습이 정말 멋졌다.

그의 글은 굉장히 많은 담론을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어떨 때는 슈퍼컴퓨터가 쓴 것처럼 느껴질 만큼 정보량이 많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소지품을 소개하면서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확언하지 않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물론 다른 의견도 있을 것이다’라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원래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귀여우면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것은 이렇게 이유 없이 시작된다.

이른바 ‘덕질 밈’ 중에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말 중 하나도 “이렇게 좋아할 계획은 없었는데”일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새로움 혹은 충격은 인생에 굉장한 활력소가 된다.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학문, 지인, 특정한 시간, 업무 중에서 발견하는 무언가 등등 우리가 덕질할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하다.

책만 읽다가 오프라인 행사까지 가게 된 건 채 반년이 되지 않았다. 각종 플랫폼에 정지돈의 이름을 검색해 열리는 행사 중 갈 수 있으면 대부분 가다 보니 내적 친밀감도 정말 많이 쌓였다. 그를 대면했을 때 나는 그의 태도 덕분에 한 번 더 ‘덕통’ 당했다. 그가 팬에게 지키는 깔끔한 선이 정말 ‘어른’스럽다.

사실 나의 덕질은 매우 특수한 경우다. 누가 소설가를 이렇게 열렬히 쫓아다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타쿠’나 ‘덕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덤을 떠올릴 것이다.

이른바 ‘돌 팬덤’은 좋아하는 대상에게 금전적, 심리적, 시간적 자원을 제공하면서도 무시 받고 사생활을 침범받는다. ‘돈 내는 불가촉천민’이라는 별명까지 떠돌 지경이니 말이다. 이들은 서비스 구매자임에도 약자의 위치에 놓인다. 팬이 가진 애정을 이용하거나 곡해하는 현장을 내 주위에서도 자주 목격한다.

거대 담론을 외면하고 작은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나는 누군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그의 인생 전반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첫인상으로 사람 전체를 판단하기까지 3초가 걸린다고 했던가. 그 3초를 위한 데이터베이스는 인생 전체일 것이기 때문에 그 태도가 인생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 날 ‘회사에서 칭찬은 연봉으로 하는 것이고 개인적으론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을 들었다. 내 연봉이 이상과 괴리가 있는 것과 별개로 문장 자체가 틀린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변함없다. 회사야 인간을 납작하게 눌러 노동 결과 창출만을 정량적으로 판단해 돈을 주는 기관이니 ‘회사의 칭찬=연봉’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개인은 칭찬할 이유가 없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왕 누구나 힘들게 사는데 서로서로 아껴가며 살면 좋지 않겠느냐는 게 나의 지론이다. 칭찬이나 긍정적인 말이 누군가에게 지는 것도, 내가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가 훨씬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북토크에서 함께 강연을 들은 다른 참가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 저는 이 세상이 괴로운 지옥인데 로컬이 이상향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잉크를 잘못 푼 물을 희석하는 방법은 물에서 잉크를 걸러내는 게 아니라 새로운 물을 채우는 것이라고 한다. ‘덕질’이든 일상 속에서 느끼는 행복이든 모두가 각자의 행복한 순간들로 일상을 채워 살아갈 힘을 얻길 바란다.

황태린 님은 지구종말론의 혼돈 속에서 태어나 자연에게 배우며 자랐다. 역사, 심리, 소설, 인간, 테크 등 다양한 분야를 ‘덕질’하던 유년을 지나 지금은 홍보대행사 2년차 막내 직원을 거치는 중이다. 문예창작 전공으로 글로 배운 건 글뿐. 세상을 온몸으로 버티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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