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000 씨'는 높임말일까 낮춤말일까

입력 2023-11-27 10:00   수정 2023-11-27 15:48


얼마 전 야당의 한 의원이 방통위원장을 가리켜 “XXX 씨” 하고 불러 논란이 됐다. 다음 날에는 또 다른 의원이 대통령을 지칭하며 “○○○ 씨”라고 해 파장을 일으켰다. 우리말 ‘씨’를 둘러싼 호칭어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전임 대통령에게 ‘씨’를 붙여 부르다 SNS를 폐쇄당한 것을 비롯해 멀리 ‘김종필 씨’ 사건에 이르기까지 연원이 깊다. 공통점은 대개 정치권에서 나오는 구설이라는 점이다. 정치권의 저급한 ‘막말 논란’의 한 가지임을 알 수 있다.
동료에겐 존대어, 윗사람에겐 못 써
1998년 8월 26일 국회 본회의장.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S의원이 김종필 국무총리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는 김 총리를 시종일관 “김종필 씨”라고 부르면서 공세를 폈다. 여당 석에서 “그만해” 하는 고함이 터져나오면서 본회의장은 순식간에 험악한 분4위기에 휩싸였다. 여당 쪽에선 “어떻게 국무총리를 ‘씨’라고 부를 수 있느냐”며 강력히 항의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국회에서 호칭을 두고 다투는 상황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씨’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게 여기는 이 말의 출처는 한자 ‘氏’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씨’이지만 막상 정색하고 들여다보면 그 용법이 간단치 않다. 먼저 잘못 알고 있는 ‘상식 같은’ 얘기 하나. ‘씨’가 존대어라고 하는 주장 혹은 인식이 그것이다. 그렇지 않다. ‘씨’는 아랫사람이나 비슷한 또래한테 붙이면 대접해 부르는 말이지만, 윗사람한테는 붙이지 못한다. 아버지나 선생님을 그리 불렀다간 매우 예의 없는 사람으로 치도곤을 당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씨’의 층위는 상당히 다면적이다. 같은 또래라도 잘 모르는 사이에 붙이면 존중 의미가 담기지만, 친한 사이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약간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말투라 친구 간에 억지로 그리 말하면 오히려 서운해한다. 이런 쓰임새는 모국어 화자라면 어려서부터 몸에 익혀 따로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나오는 예법이다.
20년 전까지 사전서 존대어로 설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 ‘씨’를 존칭어라고 주장하는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우리말의 사용을 처음으로 집대성한 게 한글학회에서 펴낸 <조선말큰사전>이다. 1929년 엄혹한 일제강점기 때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구성한 뒤 순차적으로 1957년에 완간했다. 당시에는 ‘씨’를 ‘사람의 성이나 이름 밑에 붙여 존대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로 풀이했다. 요즘 일각에서 오해하는 ‘씨’에 대한 생각 그대로다. 1961년에 나와 1981년 32쇄를 찍으며 국어사전의 대명사 격으로 널리 알려진 이희승의 <국어대사전>(민중서림)에서도 똑같이 풀었다. 이런 풀이는 한글학회에서 1992년에 펴낸 <우리말큰사전>은 물론, 1995년 금성판 <국어대사전>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모든 사전이 ‘씨’를 존대어로 풀이해온 것이다. 반쪽의 용법만 보여준 셈이었다.

‘씨’의 풀이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99년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에서였다. “(성년이 된 사람의 성이나 성명, 이름 아래에 쓰여)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 공식적·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가 아닌 한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로,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라고 설명했다. 단서 조항이 붙으면서 비로소 ‘씨’의 온전한 쓰임새가 제시됐다.

하지만 ‘씨’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이후에도 지속됐다. 2017년 한 언론사에서 2면에 “대통령 부인 존칭을 ‘씨’에서 ‘여사’로 바꿉니다”라는 ‘알림’을 크게 냈다. 알림에선 창간 이래 30여 년을 써오던 ‘씨’를 ‘여사’로 바꾸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주목해야 할 곳은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듯이 ‘씨’는 ‘사람의 성이나 이름에 붙여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이르는 말’이다”라고 주장한 대목이다.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호칭을 ‘여사’로 바꾸는 순간에도 ‘씨’가 존대어라는 ‘반쪽 용법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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