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의 비단’은 숙종 이후 정조 때까지 약 150년간의 짧았던 조선 상업사(史)의 결과다. 인동 장씨 같은 역관 집단이 삼각 무역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 ‘고려 인삼’이다.
사행길에 오른 역관들은 출장비 대신 인삼을 들고 청의 상인들과 사무역을 벌였다. 인삼을 팔아 비단을 사 오고, 비단을 일본에 되팔았다. 이때 일본에서 들어온 다량의 은화 덕분에 당시 조선은 제한적이나마 대항해 시대의 동북아시아 무역망에 편입됐고, 그 덕분에 영·정조 연간에 상업의 씨를 뿌릴 수 있었다. 장희빈이 사치를 누릴 수 있던 것도, 정조가 미완의 개혁을 단행할 수 있던 것도 근원을 따지자면 상당 부분 인삼에 빚을 지고 있었던 셈이다.
파르마톤이라는 인삼 성분을 함유한 비타민 브랜드는 거대 제약사인 사노피 소유다. 호주의 SFI헬스는 진셍과 발음이 비슷한 ‘진사나(Ginsana)’라는 이름의 인삼 비타민 제품을 판매 중이다. 중국과 싱가포르도 그들의 토양에서 자란 인삼을 세계화하려고 혈안이다.
‘K푸드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역사성과 여전히 유효한 브랜드 파워에도 불구하고 한국 인삼산업은 위기에 처해 있다. 국내 건강기능식품 중 인삼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2년 50.3%에 달했으나 2019년 37.9%로 감소했다. 1020세대의 쇼핑 놀이터로 불리는 CJ올리브영이 최근 건기식 등 헬스케어 상품군을 확대하면서 인삼 제품을 쏙 빼놓은 건 인삼의 현재 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수출도 상황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수출액은 2억7000만달러(약 3500억원)에 그쳤다. 라면(11월 누적 8억710만달러)은 고사하고, 올해 1조원 수출액 돌파가 예상되는 김과 비교해도 형편없는 실적이다.
국내에서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가진 KGC인삼공사(인삼공사)가 전 세계 40여 개국에 250여 개 제품을 수출하는 등 끊임없이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 중국, 대만, 미국, 일본에 있는 인삼공사 해외 법인은 지난해 27억원의 적자를 냈다. 전체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15%(2022년)에 불과했다.
K식품의 효시인 인삼은 왜 세계화에 실패한 걸까. 인삼공사의 사명에서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KT&G의 100% 자회사인 인삼공사는 민간 기업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명에 ‘공사(公社)’를 쓰고 있다. 전매청 시절 국내 시장에서 독점으로 누렸던 공신력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는 얘기다.
K인삼이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건 인삼공사의 공이 크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전매청 직원과 인삼 상인으로 구성된 ‘삼종회수특공대’는 목숨을 걸고 북한군 점령지인 개풍군에 특파돼 인삼 종자를 확보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인삼공사는 인삼에 관한 한 세계 최고 권위를 갖고 있다. 9월 말 기준으로 국내 7715건, 해외 1만2686건의 인삼 관련 지식재산권을 보유하고 있다. 구슬은 벌써 서말이다. 인삼공사가 사명부터 바꾸고 혁신을 통해 세계로 뻗어 나아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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