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만 내디디면 되는, 포디움의 유리천장은 20세기 중반에야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안토니아 브리코(1902~1989) 등 여성 프로 지휘자들이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 밴클라이번콩쿠르 결선 무대에서 임윤찬과 호흡한 마린 알솝, 한국인 여성 최초로 베를린필을 지휘하게 된 김은선 등이 대표적이다.
tvN의 ‘마에스트라’는 프랑스 드라마 ‘필하모니아’를 각색해 국내에선 한번도 선보인 적 없는 여성 지휘자를 다룬다. 주인공은 동양인이자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지휘자 차세음(이영애 분)이다. 마에스트라의 이미지를 몸에 새기기 위해 배우 이영애는 1년 가까이 지휘 트레이닝을 받았다. 지휘 트레이닝 ‘선생님’은 현실 세계의 마에스트라 진솔(36).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독일 만하임국립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한 진솔은 클래식 음악과 게임 음악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차세대 지휘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총괄예술자문으로 드라마 제작에 참여한 진솔은 이영애의 지휘 코치는 물론 드라마 음악 전반에도 관여했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진솔을 만났다.
“드라마를 통해 여성 지휘자가 더 주목받는 계기가 됐으면 했어요. 자문 제안이 올 때부터 제 일처럼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드라마에)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잘 표현됐습니다. 고증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이전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오케스트라 편성에 맞지 않게 연주하는 장면이 많았어요. 관악기가 없는 곡인데 관악기 소리가 들리는 장면도 있었죠.”
▷장면에 어울리는 음악을 직접 골랐다고 들었습니다.
“차세음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장면 기억하세요? 차세음이 무대에서 지휘봉을 놓칠 때 슈만 교향곡 4번의 4악장이 나옵니다. 숨 가쁘게 빠른 템포 때문에 프로 연주자들도 혼쭐 나는 파트예요. 지휘자가 지휘봉을 놓치려면 그럴만한 곡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슈만의 이 곡이 떠올랐죠. 6화에서 나온 브람스 교향곡 1번도 제 의견이 반영됐습니다. 브람스 1번은 묵직한 팀파니 연주로 시작되는데, 무거운 발걸음처럼 들리는 도입부가 차세음에게 병이 다가오는 (또는 병을 가진 엄마가 다가오는) 장면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차세음 지휘 스타일의 포인트는 어떤 게 있나요.
“이영애 배우는 ‘엣지’가 중요하다고 했어요. 시청자의 눈에 확 들어와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가녀린 여성이 남성 지휘자들처럼 파워풀하게 지휘하는 게 어디 쉽나요. 그래서 생각한 게 ‘예비박’ 연출이에요. 음악을 시작하기 전에 지휘자가 여분으로 주는 박자죠. 현실에선 지휘할 때 예비박이 기본이지만 드라마에 담기엔 연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존 드라마엔 그런 장면이 없었죠. 정박자만이 아니라 ‘루바토’(템포를 일정 한도 내에서 유연하게 조절)를 많이 넣은 것도 차별점이에요. 지휘하기 훨씬 어려워서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참고한 지휘자가 있습니까.
“일단 제 지휘를 많이 참고했고요.(웃음) 세계적 명장들의 영상을 보고 괜찮은 점을 부분적으로 반영했어요. 구스타보 두다멜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죠. 누구 한 명을 모델로 삼지는 않았어요. 누군가를 그대로 따라 하는 건 쉽지 않거든요.”
▷차세음은 악장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문제가 있는 것까지 알아채더군요.
“네. 악장이라 앞에 있으니까 바로 들렸을 것 같아요. 차세음 본인이 바이올린을 하기도 했고, 그 악장의 연주 실력을 원래 알기도 했을 테니까요. 게다가 귀가 좋고 예민한 지휘자로 나오는 만큼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지휘자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은 무엇인가요.
“지휘자에게는 무엇보다도 귀가 제일 중요해요. 그리고 몇십 명 앞에 서서 내가 원하는 걸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항상 필요합니다. 지휘에는 ‘잘하는 법’이란 정답이 없어요. 어떤 포인트에서든 악단의 실력을 끌어올렸다면 능력 있는 지휘자라고 봅니다. 지휘자가 크레센도를 잘 표현했다고 잘한 게 아니라 단원이 크레센도를 제대로 했는지가 중요하다는 거죠.”
▷여성 지휘자로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고충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웬만한 남자보다 잘해야 한다’ ‘여성이라는 게 약점이 되지 않도록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요.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삶에 익숙하죠. 도전의 연속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여유로운 마음으로 하는 여성 지휘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며 새로운 이력을 갖게 됐네요.
“이영애 배우는 2000년대에 정점을 찍은 톱배우잖아요. 그런데도 새로운 도전을 위해 노력하는 걸 보고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저 역시 제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뭔가를 계속 보여주고 싶어요. 남들이 말하는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보다는 확실하게 각인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위인처럼 살지 않을 거면 음악을 왜 했나’ 하는 발칙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카라얀처럼 전설로 남는 마에스트라가 되고 싶어요.”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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