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자이스와 덴마크 노보노디스크처럼 안정적 지배구조와 지속적 혁신을 통해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이어가는 ‘백년기업’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은 주요 선진국이 원활한 경영권 상속을 위해 각국 현실에 맞는 다양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익재단, 신탁 등 경영과 소유를 분리하는 제도, 의결권 분산을 막을 수 있는 차등의결권 주식 등이 대표적이다. 경영권 할증까지 더해 최대 60%에 이르는 상속세를 내야 하고 공익재단 등을 활용한 상속도 사실상 막아 놓은 한국과 대조된다.
자이스 최대주주는 칼자이스재단이다. 창업주인 칼 자이스가 타계하자 사업 파트너인 에른스트 아베 예나대 교수는 칼자이스재단을 세워 보유 주식을 모두 출연했고 창업자 아들을 설득해 잔여 지분을 전부 출연했다. 동독과 서독으로 분할되고 다시 합쳐지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현재도 칼자이스재단은 자이스 주식을 100% 보유하고 있다.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이 5대에 걸쳐 160여 년간 이끌고 있는 발렌베리그룹도 재단과 차등의결권을 활용해 경영권을 이어가고 있다. 화학업체 머크,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자동차부품업체 보쉬 등 유럽계 그룹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안정적인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공익 목적의 사업을 영위하지 않는 재단엔 상속세 감면 혜택을 주지 않는다. 대신 차등의결권, 신탁 제도를 활용해 소유 구조 분산을 최소화하고 있다. 친환경기업으로 널리 알려진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가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이본 쉬나드 파타고니아 회장은 2022년 전체 주식 중 98%(4조2000억원)에 해당하는 의결권 없는 주식을 환경단체에 기부한다고 밝혔다. 나머지 2%인 의결권 있는 주식은 ‘파타고니아 목적 신탁’에 출연했다. 기업이 창출하는 수익의 대부분을 사회 공헌에 쓰도록 하겠다는 창업 이념이 반영됐다.
대신 쉬나드 회장은 의결권 주식을 통해 최고경영자(CEO)를 뽑고 관리하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미국에선 포드·록펠러·카네기재단 등이 차등의결권과 재단을 통해 경영권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정부는 재단에 각종 혜택을 주는 대신 공익재단이 투자자산의 5% 이상을 매년 공익목적지출(적격배분)에 써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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