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강엔 '검은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다

입력 2024-01-29 18:44   수정 2024-01-30 00:23


수천만 번의 망치질로 고정한 셀 수 없이 많은 단추, 겹겹이 이어져 입체적인 색을 뿜어내는 실들. 이것들은 벚나무가 되고, 꽃봉오리가 되고, 새가 되고, 궁궐이 된다.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이름난 설치 작가, 황란(64)의 작품들이다.

황란의 전시 ‘Ascent of Eternity, a Requiem(영원 속으로 승천하는, 진혼곡)’이 지난 20일 서울 반포동 채빛섬 애니버셔리 뮤지엄에서 개막했다. 이번 전시는 라이팅 아티스트 크리스 공(공경일)과 협업했다.
작품 활동 전환점이 된 9·11 테러
‘Another moment of rising(비상하는 또 다른 순간, 2023)’에선 붉은 날개를 힘차게 뻗어낸 검은 독수리가 용맹하게 날아오르는 모습이 펼쳐진다. 높이 4m, 넓이 16m의 타원형 설치 작품에 빛과 향이 혼합해 주변을 돌며 감상할 수 있다. ‘Dreaming of Joy(행복을 꿈꾸며, 2008)’는 새장 안의 붉은 새가 흩날리는 붉은 장미꽃잎, 꽃봉오리들과 어우러진다.

황 작가는 원래 ‘단추의 아티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일상적인 재료이자 아주 작은 소품인 단추는 그의 손에서 스펙터클한 건축물과 형상으로 진화한다. 미국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해 뉴욕 퀸즈미술관, 브루클린미술관에서 작품을 선보인 그는 유럽과 아랍에미리트, 아시아 주요국에서 전시를 열었다. 뉴욕 휴스턴미술관과 브루클린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아부다비 왕립미술관 등이 영구 소장했고, 테니스 스타 로저 페더러 등 다수의 개인 소장가도 그의 작품을 품었다. 2021년엔 페이스북 뉴욕에서 전시해 화제를 모았다.

부산 출생인 그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인 30대 후반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1997년부터 SVA(스쿨 오브 비주얼아트)에서 공부하던 그에게 2001년 9·11 테러는 작품 활동의 큰 전환점이 됐다. 삶과 죽음은 물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인생의 불확실성은 내면을 뒤흔들었다. 당시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의류회사에서 자수 도안을 그리고 있었다. 뉴욕의 플리마켓에서 하나에 1달러짜리 실뭉치, 5달러어치 색색의 단추 더미를 보며 “이게 다 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일하던 회사에 쌓여 있던 단추 재고를 구할 수 있었고, 그게 작업의 시작이었다. 최근 작품들은 코로나19 팬데믹 때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생을 다한 사람들을 위한 위로이자 애도의 목소리를 반영했다.
일상의 아름다움 형상화
황 작가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상징적이고 거대한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작품을 잇달아 내놨다. 아주 커다란 핀에 단추를 꽂아 두드리고 매만지면서 작은 것들이 주는 삶에 대한 성찰과 치유의 예술을 확장해 나간 것.

반복과 고행을 동반하는 정교한 수작업은 서양 예술계에서 보기 드문 형상과 색채로 해외 컬렉터와 미술관들의 눈에 먼저 띄었다. 그의 작품은 높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망치를 수천 번 두드리고 이어 붙여야 겨우 완성된다. 그것들이 부처의 형상이 되기도 하고, 한국의 궁궐이 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입체적인 작품 앞에 사람들은 “어디서도 본 적 없다. 독창적이다”는 반응을 쏟아낸다.

그의 작품은 ‘삶과 죽음’의 모티프에서 시작됐지만 다수의 작품이 밝고 힘차다. 죽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갈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반짝반짝 아름답다.

가까이에서 보면 촘촘하고 정교하게 높낮이를 달리한 채 꽂혀 있는 핀들이 마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모습처럼 해석된다. 선명한 색채가 삶 전반에 흐르는 낙관주의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전시는 2월 22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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