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이 만든 건물 [더 라이프이스트-성문 밖 첫 동네, 충정로 이야기]

입력 2024-02-02 18:08   수정 2024-02-02 18:10

우리나라가 민주화 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신문만 펼치면 ‘강민창 치안 본부장’의 이름이 나왔다. 서슬 퍼런 엄혹의 시기에 경찰 업무를 총괄했던 곳 치안본부, 치안 본부장 강민창. 민주화의 대척점에서 늘 소환되던 인물이다. 강민창 치안본부장 시절인 1986년, 서대문 밖 이곳에 치안본부 청사가 들어섰고 1991년 경찰청으로 바뀌었다. 근처를 지날때면 아직도 치안본부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신문사에 근무할 때, 경찰청 뒤쪽 담을 따라 샛길을 지날 때가 많았다. 샛길을 통과하면 사조산업 건물이 나온다. 그 옆에 KT&G, 미동초등학교가 이웃해 있다. 5호선 서대문역 옆이다. 골목에서는 금방이라도 정치 깡패 김두한과 이정재가 나와 가죽장갑을 끼고 주먹다짐을 할 것 같은 60, 70년대 분위기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경찰청을 두르고 있는 높은 벽돌담이었다. 광화문 맞은편 옛 의정부터 자리에 있던 치안본부가 1986년에 이곳에 신축해 들어왔다는데 그때 생긴 담일까? 이전부터 있던 담일까? 오래된 붉은 벽돌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1930년대 지도를 살펴보면 서대문 사거리를 중심으로 서대문 경찰서, 우체국(현재 충정로 우체국), 금융조합(농협 전신), 병원(서울 적십자 병원), 전매국 연초공장이 나온다. 병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경기감영 터에 들어선 적십자병원이다. 적십자병원 옆 죽첨정 1정목(충정로 1가)에 서대문 경찰서가 있었다. 우체국도 그대로다. 이런 기관들이 일찍부터 들어선 것은 서대문 밖, 이 동네가 발전이 빨랐기 때문이다. 1907년 서대문에서 마포 종점까지 전찻길이 개통되자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변화가 생겼다. 일본인들도 금화장 문화주택 단지를 개발해서 몰려들었다. 경성 북서쪽에서는 남산 자락의 혼마치(충무로), 메이지정(명동), 황금정(을지로)과 함께 서대문 주변이 꽤 '핫 플레이스'였다.

지도 속 ‘전매국 연초 공장’을 찾아 이리저리 한참 뒤적이니 가늠이 되었다. 옛 치안본부, 지금의 경찰청 자리다. 그제서야 경찰청 뒷골목의 붉은 벽돌의 정체를 알겠다. 전매국 연초공장 시절부터 있던 담이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산업시설을 갖춘 근대적 공장은 옷을 생산하는 방직공장, 신발을 만드는 고무신공장 등 주로 생필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이곳에 있던 연초 공장에서는 대다수 남자의 기호품인 담배를 만들었다. 1990년대까지 있었던 구로공단의 모습과 흡사한 서대문 밖의 풍경이었다. 6.25 전쟁이 터지고 패퇴하던 인민군들을 소탕하느라 이 지역은 쑥대밭이 됐고 이를 빠르게 복구해야 했다. 밥은 굶어도 담배는 끊지 못하던 사람들, 이 공장은 1975년에 충남 신탄진으로 이사했다. 어릴 적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으로 ‘신탄진’을 사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곳의 담배공장이 신탄진으로 이주하고 새로 발매된 상품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경찰청 자리에 있었던 연초 공장의 모습은 어땠을까? 당시 삼천리라는 잡지 제 7권 제 11호(1935년 12월1일) 자에 의주통 전매국 연초공장 견학기가 소개돼 있다.

"커다란 벽돌집 주위에 놉다라게 올려 싸인 담벽은 마치 감옥소 담갓치 견고하여 날 새도 잘 출입 못하게 만들어졌다. (중략) 작업장 안에는 17, 18세 가량 되는 봄 동산에 아릿다웁게 피는 꽃봉우리와 갓흔 아가씨들이 갓득이 잇엇다. 맛치 여자만 살고 잇는 나라에나 다다른 듯한 감이 잇엇다"고 소개한다.

공장은 벽돌로 지어졌고 공장을 두르고 있는 담이 너무 높아서 새도 다닐 수 없을 것 같다고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지금의 경찰청을 둘러싼 담중 오래된 붉은 벽돌이 박힌 곳이 그 연초공장의 흔적이다. 서울, 대구, 평양, 전주 네 곳의 연초 공장에 3천 명의 직원들이 근무했고, 성문 밖 이 곳에는 천 명이 넘는 여직원들이 있었다. 5호선 서대문역에서 나오자 마자 보이는 KT&G 건물이 경찰청과 이어진 연초 공장 터였을 것이다.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도 소개된 것으로 보아 이 곳에 근무하는 여공들이 사회적 관심이었나 보다. “배다리 반찬가게로 향하는 귀돌어멈의, 왼편으로 약간 고개를 갸우뚱한 뒷모양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십칠 세 씩 된 머리 땋아 늘인 색시가 세 명, 걸음을 맞추어 남쪽 천변으로 걸어 내려 온다. 흡사 학생 같이 차렸으나,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벤도 싼 보자기로, 조금 전 다섯 시에, 전매국 의주통 공장이 파한 것이다.“ (박태원, 천변풍경, 문학사상 53페이지)

여기에서 말하는 의주통이 의주로, 지금의 통일로이다. ‘통’이라는 행정단위는 일제강점기에는 길게 뻗은 큰 도로를 의미했다. 광화문로를 광화문통, 의주로를 의주통이라 불렀다. 소설 속 ‘전매국 의주통’ 공장은 경찰청 자리에 있던 전매국 연초 공장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점심은 도시락(벤또)으로 해결했고 다섯 시에 업무가 끝나 퇴근 시간이 빨랐던 것 같다.

공장 옥상에는 미니 골프장을 만들었다. 미니 골프장이라 하지만 아마 그린에 홀컵을 만들고 퍼터로 공을 굴려 넣는 정도의 시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설을 만들 정도라면 종업원들에게 신경을 많이 쓴 작업장이다. 일과 전에는 천 명이 넘는 사원들이 라디오의 음악에 맞춰 아침 체조를 했다. 글을 모르는 여공들에게는 기본적인 학습을 시켰다. 정기적으로 휴가를 주었다니 처우도 좋은 편이었다.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이 연초 공장과 깊숙이 관계된 사람이 있다. 바로 시인 이상이다.

“그다는 희망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 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 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무서운 기록이다.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1930년 4월 26일 於義州通工事場

그의 소설 '12.12'의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유년 시절부터 깊은 우수 속에 살았던 이상은 자살 충동에 늘 괴로워했다. 작품을 끝마치기 전 자살의 유혹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랬다. 그의 우울은 양부인 백부 김연필과 생부인 아버지 김영창 사이에서 싹텄다. 강릉 김씨(이상의 본명 김해경) 큰아버지 집으로 호적을 옮겨 대를 이었다. 큰아버지는 본처를 내쫓고 아들 딸린 여인을 아내로 얻는다. 그러나 첩의 아들 ‘문경’은 자기 핏줄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대한제국의 실업학교 ‘공업 전습소’를 다닐 만큼 개화사상이 배인 인물이다. 손가락 세 개가 없는 무식한 이발사인 동생에게 살던 집을 주고, 조카를 자기 아들로 들였다. 이상의 원초적 불안과 우울의 근원이었다. “펜은 나의 칼이다” 이상은 처녀작 '12.12'의 서문에서 자기의 마음을 내비쳤다. 1930년 4월 26일 於義州通工事場.(의주통 공사장에서) 의주통 공사장이 이곳 연초 공장이다.

우리는 이상을 시인으로 기억하지만, 그는 매우 우수한 건축가였다. 경성 고등공업 학교(서울대 건축과 전신) 토목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보성고보시절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러나 대한제국 공업 전습소 출신 양아버지의 강요로 경성고공 건축과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법전이나 의전에 갈 실력은 되지만, 법관도 싫고 의사도 적성이 맞지 않아 다른 길을 택하는 수재들이 선택하는 학교였다. 같은 학년 15명 중 조선 학생은 두세명, 그는 학년에서 늘 수석이었다. 이상은 화가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 전람회’가 공진회 전시장(경복궁)에서 열릴 때 '자화상'으로 입선했다. 시인 이전에 화가였고, 화가 이전에 최고의 건축가였다. 경성고공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었던 조선 총독부에서 기사가 되었다. 조선 총독부 청사(구 중앙청), 한강대교 개축현장, 마포 형무소 벽돌 공장 등에서 견습하며 건축가로서 꿈을 키웠다. 경찰청 자리에 있던 연초 공장에는 그의 땀과 고뇌가 서려 있다.

그의 건축과 입학 동기인 일본인 건축가 오오스미는 잡지 ‘문학사상’과의 좌담회에서 ”그의 건축설계를 보면 그렇게 세밀하고 정확할 수가 없아요. 한 획 한 점을 소홀히 긋고 찍지 않는단 말이야요“라며 이상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다.

“지식의 첨예각도 0도를 나타내는 그 커다란 건물은 준공되었다. 최하급 기술자에 속하는 그도 공존히 그 낙성식에 참여 하였다” 1930년 3월9일 낙성식에 말단 관료로서 유니폼을 입고 줄줄 눈물을 흘리며 참석했다.

이상은 이곳에서 7개월을 일했다. ’의주통에 개울 흐르고 개울가에 포플러가 있고 철도로 기차가 달린다‘고 이곳의 풍경을 소설 속에 재현했다. 의주로를 가로지르는 만초천, 그 양 옆의 포플러 가로수, 경성역에서 수색을 지나 의주로 가는 경의선,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만초천은 복개돼 흔적을 찾기 어렵다. 가로수도 그때와는 사뭇 다르다. 남아 있는 것은 지금도 아련히 옛 향수를 소환하는 철길이다. 그는 이곳 배선공사에 투입됐다. 짬짬이 시, 소설, 그림을 그렸다. 건물 완공 후 1930년 11월 총독부 관방 회계과로 전임된다. 그러나 폐결핵이 도져서 각혈이 시작됐다. 선망의 대상이던 총독부 기사직도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절친한 구본웅과 배천 온천에 요양차 갔다가 금홍이를 만난다. 그녀와 경성으로 돌아와 제비다방을 열었으나 망했고, 시청 앞 이명래 동생 이순석이 차린 낙랑파라에서 변동림을 만나 결혼했고 일본으로 떠났다가 병이 도져 죽는다.

그가 죽기 전에 변동림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아 멜론이 먹고 싶다"였다고 한다.

경찰청의 위압적인 건물만이 덩그러니 통일로를 지킨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의주통 연초공장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경찰청 뒤편 KT&G 건물만이 전매국 의주통 연초공장의 내력을 추측하게 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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