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살 할아버지가 빛으로 그린 '동양의 디즈니'

입력 2024-02-06 18:10   수정 2024-02-07 00:22



“그림자가 있는 곳엔 반드시 빛이 있다.” ‘가게에’(影繪·그림자 그림) 작품을 만드는 일본 작가 후지시로 세이지(100)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이 말을 되새기며 살아왔다. 그 긴 세월 동안 후지시로는 전쟁과 가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등 삶의 어두운 순간을 숱하게 지나왔다. 하지만 그는 그림자보다 빛에 집중했다. 빛을 쏘면 나타나는 그림자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동화적인 모양과 따뜻한 색을 즐겨 쓰는 것도, 100세가 된 지금까지 사랑과 평화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작품에 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오사카 파노라마’는 후지시로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작품 200여 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다. 국내에서 열린 그의 전시 중 최대 규모로, 1940년대부터 80여 년에 걸친 작품세계를 망라한다.


후지시로가 창시한 가게에는 면도칼로 오려낸 종이와 컬러필름에 빛을 투사해 빛과 그림자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처음 기법을 고안한 시기는 일본이 전쟁으로 황폐화된 1940년대. 물감을 비롯한 그림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후지시로가 들판에 굴러다니는 골판지와 철사, 전구 등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됐다. 여기에 게이오대 경제학부 재학 시절 접한 인형극과 일본 전통 그림자 연극의 요소를 가미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1950년대부터 그는 신문과 인기 잡지 등에 작품들을 연재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의 작품은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 포스터에 실렸고, 인형극은 역사 깊은 공연장인 부도칸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훗날 일본의 대중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로도 그의 작품은 ‘동양의 디즈니’(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로 불리며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작풍으로 오랜 세월 사랑받고 있다.


이번 전시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한국 설화 ‘선녀와 나무꾼’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 나왔다는 것. 1958년 일본의 한 잡지에 연재한 이 작품의 원본은 사라졌지만, 후지시로가 이번 전시를 위해 99세 때인 지난해 14점을 다시 제작했다. 이 밖에도 전시장에서는 ‘하늘을 나는 난쟁이’ 연작과 ‘서유기’, ‘목단기’,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개구리를 소재로 한 인형극 ‘케로용’, 가게에 작품을 응용한 그림자극 ‘눈의 여왕’, ‘은하철도의 밤’ 등 그를 대표하는 다양한 연작을 만날 수 있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알고 보면 더욱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많다.

장점이 많은 전시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한국에 공개된 작품이 적지 않고,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특유의 복잡한 구조를 잘 활용해 전시를 짜임새 있게 구성했다. 1층에서 지하 전시실로 내려가는 공간을 극장처럼 꾸미고 인형극 영상을 상영하는 게 단적인 예다. 3년 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같은 작가 전시를 본 관람객도 다시 전시를 찾을 만하다. 전시는 4월 7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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