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ELS 투자 손실, 정부가 설계한 제도로 일어났다

입력 2024-02-21 15:04   수정 2024-02-21 17:36


정부가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투자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8년 전에 인지하고도 은행과 개인투자자의 ELS 투자가 홍콩 H지수에 집중되도록 제도를 설계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홍콩 H지수 ELS 투자자의 손실 규모가 올해 수조원대로 불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부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일부 금융사의 불완전판매 행태에 대해서도 금융당국이 감독을 제대로 해오지 못한 책임이 큰 만큼 정부가 은행과 ELS 투자자 사이의 배상안을 직접 마련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봤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2019년 12월 '고위험 금융상품 투자자 보호 강화를 위한 종합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불완전판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내놓은 이 방안을 통해 금융당국은 은행에서 판매하는 ELS가 기초자산으로 삼을 수 있는 자산을 5개 주가지수로 제한했다. 한국의 코스피200과 미국의 S&P500, 유럽의 유로스톡스50, 일본의 닛케이 225, 홍콩 H지수를 뜻하는 HSCEI 등이다.

독일 국채 금리처럼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초자산으로 위험한 파생상품을 만들어 팔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이 규제는 결과적으로 홍콩 H지수 ELS 투자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불러왔다. 정부가 ELS의 기초자산을 딱 다섯 가지로 제한하는 바람에 은행은 홍콩 H지수보다 안전하면서도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는 타국 주가지수 기반의 ELS를 판매할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ELS의 기초자산을 다섯 가지 주가지수로 제한한 정부는 동시에 은행에 비이자수익을 확대하라고 압박했다. 국민에 대한 '이자 장사' 대신 비이자수익을 적극 확대해 전체 이익에서 이자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을 낮추라는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금융당국의 지침이다. ELS가 대표적인 비이자수익원인 상황에서 정부의 비이자수익 확대 압박까지 들어오자 은행들은 다섯 가지로 제한된 ELS를 적극 판매했다. 이에 따라 홍콩 H지수 ELS 발행잔액은 2020년 말 16조9000억원에서 2022년 말 20조6000억원까지 늘었고, 지난해 9월 말엔 20조8000억원까지 불어났다.

결국 정부가 2019년 이후 ELS의 기초자산을 다섯 가지로 제한하면서 비이자수익 확대를 압박한 바람에 홍콩 H지수 투자가 활성화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2019년 규제를 신설하기 이전에 홍콩 H지수를 기초로 한 ELS 발행이 급증하는 상황에 대해 이미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금융위와 금감원은 2016년 11월 발표한 '파생상품시장 경쟁력 제고 및 파생결합증권 건전화 방안'을 통해 "특정 해외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ELS·DLS(파생결합증권) 발생 증가에 따른 증권사 및 시스템 리스크 우려가 증가하고 있다"고 적시했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예로 든 ELS·DLS의 기초자산이 홍콩 H지수였다.

금융당국이 2016년 홍콩 H지수 ELS의 과도한 판매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3년 뒤인 2019년 ELS 기초자산 허용 목록에 홍콩 H지수를 넣은 것이다. 이로 인해 은행들은 어쩌면 위험하지 않았을 다른 ELS 대신 홍콩 H지수 ELS를 팔았고, 지난 3년간 일어난 홍콩 H지수 급락으로 인해 올해 수조원의 투자손실이 발생하게 됐다.

한 금융업계 종사자는 "일부 불완전 판매의 책임은 은행에 있어 반드시 제재가 필요하지만, 홍콩 ELS 투자자의 투자손실 책임은 정부 몫이 크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일부 은행과 증권사가 투자자에게 손실 가능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ELS를 판매한 불완전 판매 정황이 있는 만큼 홍콩 H지수 ELS의 투자손실 일부를 금융사가 배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정부는 은행과 투자자 사이의 분담 배상 기준까지 직접 만들고 있다. 하지만 국내 경제학자 10명 중 7명은 정부가 직접 은행과 투자자 사이의 배상안을 만드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봤다. 정부가 정치적 시각에 입각해 배상안을 만들 수 있고, 그동안 불완전 판매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정부가 스스로 배상안을 만드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한국경제신문은 경제학계의 의견을 듣기 위해 지난 10~16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서울 소재 주요 15개 대학 경제학과 교수(초빙·명예교수 제외) 전원 29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46명 중 31명(67.4%)은 '홍콩 H지수 ELS 투자자의 투자손실에 대해 정부가 은행의 배상 기준을 만드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다.


김성현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배상 기준은 (은행의) 불법이 있었을 경우 법에 따라 시행해야 한다"며 "임의로 정부가 만들어선 안 된다"고 답했다. 전주용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개별 은행과 소비자들이 민사적으로 해결할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완전판매라면 (투자자가) 위험을 인지하고 투자했기 때문에 (은행이) 배상할 이유가 없고, 불완전판매라면 감독 소홀의 문제가 있는 정부가 스스로 공정한 배상 기준을 마련할 수 있는지 여부에 의혹이 있을 수 있다”며 부적절하다는 뜻을 표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교수도 "ELS 상품의 불완전 판매에 대해서는 관리감독 의무가 있는 금융당국에도 분명한 책임이 있다"고 했다.

금융감독원은 한국경제신문의 이 같은 보도에 대해 "금융감독원은 금융분쟁 발생시 합리적인 분쟁조정 기준을 마련해 필요시 분쟁조정위원회의 심의 등을 거쳐 당사자 간의 분쟁을 조정하는 업무를 수행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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