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글씨만 키우면 '어르신 뱅킹'인가

입력 2024-02-23 18:24   수정 2024-02-24 00:30

“저희 OO지점은 효율화를 위해 인근 ◇◇지점과 통합 운영됩니다.”

집 근처 대로변의 은행 점포가 또 하나 사라졌다. 오랫동안 터줏대감처럼 동네를 지키던 지점이 현수막 하나 남기고 문을 닫는 것은 이젠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흔한 일이 됐다. 5년 동안 국내 16개 은행의 점포는 1026개 줄었다. 이틀에 하나꼴로 없어지고 있는 셈이다.

올 들어선 강남, 양재 같은 서울 노른자위 상권에서도 구조조정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금융당국이 이따금씩 “폐쇄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제동을 걸면 은행들은 잠시 속도 조절에 나섰다가, 얼마 안 가 무더기 폐점을 재개하는 양상이 반복되고 있다.

어느 한쪽이 옳다고 말하기가 참 모호한 문제다. “고령층과 취약계층을 배려해야 한다”는 당국자들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억지로 틀어막는 관치적 접근법은 거칠고 촌스럽다. “손님은 줄고 인건비와 임대료는 오르는데 어떡하느냐”는 은행들의 항변에 수긍이 가면서도 다른 한쪽에서 벌어지는 성과급·퇴직금 잔치를 생각하면 또 달리 보인다.


핀테크 시대에 애물단지로 전락한 오프라인 영업망.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금융 선진국도 똑같이 고민하는 주제다. ‘교과서적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비대면 뱅킹의 편의성을 높여 고령층의 접근성을 높이고, 여러 은행이 같이 영업하는 공동 점포 등을 확대해 충격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한동안 ‘실버세대’ 못지않게 금융 접근성이 떨어지는 계층이 ‘초·중·고교생’이었다. 이들에겐 낡은 규제가 걸림돌이었다. 은행·증권사 계좌를 트려면 영업시간에 보호자가 지점에 가야 했고, 가족카드 발급에도 나이 제한이 있었다. 이런 규제만 살짝 풀었더니 청소년 전용 뱅킹 서비스가 넘쳐나고 있다.

고령층을 모바일뱅킹으로 유도하는 것은 이상적이긴 하지만 한계도 명확하다. 서울 월계동에서 신한은행 점포 폐쇄에 항의하며 노인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스마트폰 쓸 줄 몰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비대면 금융 거래에 막연한 거부감 내지 공포를 느끼는 어르신이 여전히 많다. 억지로 바꿀 수 없다. 은행권이 감당 가능한 부담을 지면서 적절한 규모의 오프라인 금융 인프라를 유지할 방법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다.

1~2년 전 우리나라 은행들이 공동 점포 실험에 나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우리·하나가 경기 용인에, 국민·신한이 경기 양주와 경북 영주에, 국민·부산이 부산 북구에, 국민·씨티가 대전 서구에 ‘한 지붕 두 은행’ 지점을 선보였다. 하지만 딱 다섯 곳 생기고, 거기까지였다. 의견이 자주 부딪치는 데다 보안 문제도 있어 진척이 없다고 한다.

몇몇 은행은 고령층 응대에 집중하는 ‘시니어 특화 점포’를 냈지만 서울과 수도권 대도시에 몇 개 있는 정도다. 송금 한 번 하려면 2~3시간 들여 읍내에 나가야 하는, 금융회사 점포가 정말 절실한 계층은 인구소멸지역에 더 많이 존재한다.

해외 은행들의 공동 점포 실험은 훨씬 과감하다. 영국에서는 다섯 은행이 뭉쳐 월·화·수·목·금요일마다 돌아가며 근무하는 점포가 등장했다. 미국과 스위스에서는 대형 트럭이 ‘5일장’ 다니듯 시골을 누비는 이동형 점포에서 단순 거래는 물론 대출 상담까지 이뤄지고 있다. 참고해볼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금융위원회는 2020년 ‘고령친화 금융환경 조성방안’이라는 것을 내놨다. 급속한 고령화에 대응해 디지털 뱅킹 접근성 확대, 시니어 맞춤형 상품 출시, 금융 사기 근절, 금융 교육 강화 등의 정책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망라된 패키지였다. 4년이 지나 다시 들여다보니 헛바퀴만 도는 항목이 수두룩하다. 고금리 혜택이 비대면 전용 상품에만 집중되지 못하게 한다거나, 고령자를 우대하는 카드·신탁·보험 상품을 육성한다는 등의 구상은 청사진에 그쳤다. 고령층에 대한 불완전판매와 보이스피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약속도 했지만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분쟁을 막지 못했다. 그나마 손에 잡히는 결과물이 나온 건 ‘큰 글씨 모바일뱅킹’ 정도다. 제작 지침 만드는 데 2년 걸리고, 이것을 2금융권까지 확대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 꾸리는 데 1년 더 걸리긴 했다.

정부가 은행의 공공성을 정말 중요하게 여긴다면 자영업자에게 ‘이자 장사’ 1조6000억원을 뱉어내라고 할 게 아니다. 은행권이 1000억원, 2000억원이라도 고령층을 위한 오프라인 인프라에 투자하도록 독려한다면 훨씬 값진 사회 환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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