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구겐하임·페레즈…美부자는 죽어서 예술을 남긴다

입력 2024-02-25 18:44   수정 2024-02-26 01:30


미국에서 가장 큰 미술관이자 뉴욕의 상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고대 이집트부터 유럽과 미국, 아시아에서 모인 300만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 흔히 영국 대영박물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대영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이 왕실 보관품이나 제국주의 시대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예술품들을 토대로 국가 차원에서 건립했다면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철저하게 민간의 기증으로 세워졌다. 1866년 파리에 살던 미국인들이 미국 독립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미국에도 이제 명품 미술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뜻을 모은 게 계기였다. 1870년 그 뜻에 동참한 변호사, 사업가, 예술가들은 십시일반으로 기금과 기증품을 모아 뉴욕에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개관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등장은 미국의 국격을 높이는 분기점이 됐다. 20세기 초 산업화 시기 막대한 부를 거머쥔 미국인들을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게 했고, 부를 가진 자들이 더 많은 미술관을 짓게 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효과’는 뉴욕을 세계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큰 몫을 했고, 쇼 비즈니스와 상업 예술의 메카였던 도시를 ‘영원불멸의 명화 한 점을 보러 찾아오는’ 명품 도시로 만들었다.
서부엔 게티, 동부엔 구겐하임
미국 최대 석유 재벌이던 J. 폴 게티(1892~1976)는 다른 영역에선 소문난 구두쇠였지만 미술품은 광적으로 수집했다. 20대 초 이미 막대한 부를 거머쥔 그는 로스앤젤레스(LA)에 게티빌라와 게티센터라는 두 개의 보석 같은 미술관을 남겼다. 당시 건축비만 13억달러 이상(약 1조7000억원)을 투입해 규모 7.5 지진에도 끄떡없는 수장고와 연구소, 전시관을 지었다. 사망 후에도 7억달러 넘는 유산을 미술관에 기부하고, 소장품과 부동산 등을 모두 재단에 넘겼다. LA게티는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해 한 해 180만 명 이상이 찾는다. 게티 인스티튜트에서 만난 앤드루 퍼척 부회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복원 전문가들이 있어 유럽의 명화, 손상된 건축 도면들이 전 세계에서 이곳으로 온다”며 “지구가 멸망해도 게티의 수장고만 무사하다면 인류의 역사는 새로 쓸 필요가 없다는 말도 과장이 아니다”고 했다. 게티 재단은 미술뿐만 아니라 출판, 음악, 예술 교육 등 LA 지역을 넘어 전 세계 예술가와 연구자 간 네트워크를 만들어 레지던시와 연구비 등을 지원한다.

서부에 게티가 있다면 동부엔 20세기 전설의 여성 컬렉터이자 예술 후원가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이 있다. 광산 재벌의 손녀로 태어난 구겐하임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화가 100여 명의 작품 수백 점을 사들였다. 그는 현대미술의 주 무대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가 없었다면 살바도르 달리도, 마르셀 뒤샹도, 잭슨 폴록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 페기 구겐하임 재단은 뉴욕 맨해튼의 솔로몬구겐하임미술관, 스페인 빌바오와 독일 베를린의 구겐하임미술관, 이탈리아 베네치아 미술관 등을 운영하며 여전히 현대미술의 정점에 서 있다.
범죄도시의 얼굴 바꾼 ‘예술 후원자’
최근 20년간 범죄도시 마이애미를 문화예술 명품 도시로 만든 주역들도 예술을 사랑하는 지역 부호들이다. 주로 부동산으로 부를 일으킨 이들은 세계 미술시장의 큰손 컬렉터이자 지역 예술가의 후원자로 거듭났다. 루벨미술관, 드라크루즈 컬렉션 등이 그렇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부동산 사업가인 호르헤 페레즈(1949년생)는 마이애미미술관에 자신이 소유한 2000만달러 상당의 중남미 미술 컬렉션을 기증하고, 추가로 2000만달러를 기부했다. 이를 계기로 2013년 ‘페레즈 아트 뮤지엄 마이애미(PAMM)’로 이름을 바꾼 이 미술관은 라틴 미술의 성지가 됐다.

쿠바계 이민자인 카를로스 드 라 크루즈 부부는 1970년대부터 마이애미에 살며 컬렉팅한 미술품을 기반으로 비영리단체 ‘무어 스페이스’를 세웠다. 마이애미 디자인 지구 안에 ‘드라크루즈 컬렉션’을 열어 현대미술 작품을 무료 공개하고 있다. 루벨미술관은 유명 컬렉터 루벨 부부가 70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개인 박물관. 신진 작가를 대거 양성하는 체계적인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유명한데, 스타 흑인 작가인 아모아코 보아포도 여기서 탄생했다.
벤처 자선가들의 땅이 ‘명품 미국’ 만들다
미국 기업가들의 문화예술 기부는 미술 영역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때 미국 최대 언론사였던 나이트-라이더의 소유주 존과 제임스 나이트 형제는 독립 민간 재단인 나이트 재단을 1950년 설립해 저널리즘 교육과 후원에 모든 재산을 바쳤다. 현재 마이애미 기반의 나이트 재단은 할아버지대부터 손자까지 3대에 걸쳐 문화예술 분야와 지역 커뮤니티, 저널리즘에 이르는 방대한 후원 활동을 하고 있다.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참여하는 펠로십은 물론 16개 주의 빈민가를 재생하는 프로젝트를 수십 년간 해오고 있다.

‘LA의 천사’로 불린 억만장자 일라이 브로드(1933~2021)도 있다. 주택 건설사 카우프만과 브로드를 공동 창업하고, 금융서비스 기업인 선아메리카를 세운 그는 2015년 1억4000만달러를 들여 LA 도심 한복판에 벌집 모양의 새하얀 건축물 브로드미술관을 지었다. 그는 부인과 함께 과학, 의학, 교육 분야에 20억달러를 기부하고 하버드, MIT와 함께 세운 생물의학 및 유전자 연구기관 브로드인스티튜트에 6억달러를 쾌척했다. 40년간 모은 2000여 점의 미술품을 “LA 시민에게 무료로 공개하겠다”며 3층 높이의 대형 미술관을 지었다. 개관 후에도 2억달러를 추가로 기부하며 평생 모은 자산을 기꺼이 내놨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열기 이전에도 LA현대미술관(MOCA) 창립 회장으로 일하며 판자촌이 많던 LA 다운타운을 ‘예술지구’로 변화시킨 주역이다.

마이애미·뉴욕·LA=김보라 기자

※이 기사는 한국경제신문이 운영하는 국내 최대 문화예술 포털 ‘아르떼’에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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