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결하고도 선명하게…쇼팽의 정수를 보여줬다

입력 2024-02-28 18:40   수정 2024-02-29 00:56


‘스페셜리스트.’

연주자의 이름 앞에 이런 수식어가 붙는 건 명예로운 일이다. 남들이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 경지에 올랐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훈장이라서다.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라파우 블레하츠는 공인된 쇼팽 스페셜리스트다. 그는 2005년 국제적 권위의 쇼팽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뿐만 아니다. 마주르카 최고연주상, 폴로네이즈 최고연주상, 피아노협주곡 최고연주상, 소나타 최고연주상 등 전 부문(4개) 특별상을 휩쓸며 대회 역사상 최초로 5관왕의 대기록을 세웠다.

지난 27일 블레하츠가 7년 만에 한국에서 연 피아노 리사이틀은 예상대로 성황이었다. 서울 예술의전당은 쇼팽의 새로운 경지를 경험해보려는 클래식 팬들로 북적였다. 그는 130분간 홀로 앙코르를 포함해 아홉 작품을 다뤘다.

1부 레퍼토리는 전부 쇼팽의 작품이었다. 그는 첫 곡인 ‘녹턴 작품번호 55-1’에서 섬세한 손끝 감각으로 음 하나하나를 천천히 조형해나가면서 특유의 쓸쓸하면서도 우울한 서정을 완연히 그려냈다. 폴란드 민속 춤곡을 뜻하는 ‘마주르카 작품번호 6’에선 자신의 조국 폴란드가 배출한 천재 작곡가 쇼팽과 같은 감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제대로 보여줬다. 선율마다 풍부한 색채를 덧입히면서도 지나친 감정 표현은 자제했고, 정형화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리듬과 화성은 생동감 있게 펼쳐냈다.

이어 폴란드 궁정에서 추던 대표 춤곡인 폴로네이즈 세 작품이 잇따라 연주됐다. 피아노의 배음과 잔향을 조율하면서 소리의 명도까지 자유자재로 주무른 ‘환상 폴로네이즈 작품번호 61’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자극적이진 않지만 고결한 표현이 내내 반짝였다.

‘군대 폴로네이즈’로 불리는 ‘폴로네이즈 작품번호 40’ 첫 곡에선 절도 있는 타건과 모든 음을 둥글게 빚어내는 세련된 터치로 춤곡 특유의 역동감을 생생히 불러냈다. 명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쇼팽이 그린 몰락한 폴란드”라고 표현한 ‘폴로네이즈 작품번호 40’ 둘째 곡에선 비극 속으로 끝없이 침잠하는 악상을 선명히 드러냈다. 정제된 음색, 음량으로 음향의 움직임을 잡아두다가도 금세 공연장 전체에 어두운 울림을 퍼뜨리는 그의 연주는 쇼팽의 절망감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폴로네이즈 6번 영웅’에선 추동력이 두드러지는 전주와 경쾌하면서도 화려한 주제 선율, 격렬한 왼손 옥타브 구간과 감미로운 브리지 구간 등을 탁월하게 대조시키면서 연주의 입체감을 살려냈다. 타건의 강도와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연주하는 것)의 명료도가 떨어지는 구간이 더러 있긴 했지만 전체 흐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2부에선 세 명의 작곡가를 조명하면서 다채로운 얼굴을 보여줬다. 드뷔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에선 음 사이사이에 여유를 두고 만들어낸 풍부한 화성과 긴 호흡으로 둥글게 빚어낸 정교한 선율 진행으로 우아하면서도 광활한 에너지를 펼쳐냈다. 모차르트 ‘소나타 11번’에선 궁전에서 들을 법한 청아한 음색과 깔끔한 터치로 작품 본연의 순수한 서정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시마노프스키 ‘변주곡 작품번호 3’에선 유연한 손 움직임으로 쉼 없이 변하는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주제 선율과 12개 변주의 성격을 명징하게 드러냈다. 뚜렷한 방향성과 강한 추진력으로 화음의 파도를 쏟아내는 그의 연주는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객석에서 “브라보”란 외침과 함께 열렬한 함성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아주 정직하고, 비범하며, 감성이 풍부한 예술가.” ‘피아노 여제’로 불리는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블레하츠에게 보낸 찬사다. 그의 평이 과장이 아니란 걸 증명할 만한 무대였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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