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내 약혼자는 안돼" 동생이 유언까지 남겼지만…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4-03-02 10:44   수정 2024-03-03 07:03



“언니, 약속해. 내가 약혼했던 그 남자와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언니와 그 남자가 이어지는 걸 생각하면….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병석에 누워 있는 동생은 옆에 앉아 있는 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생은 언니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습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언니에게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동생이 말하는 그 남자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런 얘길 할 때가 아니야. 푹 쉬어야지. 얼른 다 낫고 얘기하자.” 하지만 동생은 대답을 재촉했습니다. “나도 알아. 난 곧 죽는다는 걸. 빨리 약속해줘. 그 남자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언니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건…. 안될 일이야.” 그렇게 약속하는 게 어렵다는 뜻이었지요. 하지만 동생은 씩 웃었습니다. 그리고 옆을 지키던 수녀에게 말했습니다. “들으셨죠? 언니가 그 남자와 결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래요. 이제야 마음이 놓여요. 언니가 신께 맹세하는 걸 수녀님이 도와주세요.

가족들과 성직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동생이 남기는 마지막 소원. 이런 상황, 이런 분위기에서 언니는 도저히 “사실 그 뜻이 아니었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수녀는 말했습니다. “손을 내미세요. 절대 그의 아내가 되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언니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고 맹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몇 시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족스럽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띠고요.

이들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 후 남겨진 언니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요. 남자의 이름은 토마스 로렌스(1769~1830).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영국 최고의 화가였던 사람입니다. 오늘은 그의 삶과 명작을 조명하며 자매와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가장이 된 꼬마 천재


1770년대 중후반, 영국의 디바이지스 지방에는 ‘검은 곰’이라는 여관이 있었습니다. 이곳의 여관 주인은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별로 부지런하지 않다. 쓸데없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 좋아해서 종종 손님을 언짢게 만든다.” 이런 ‘숙박 후기’가 많았지요. 그런데도 이곳은 런던에서 온 상류층 여행객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관 주인의 아들, 꼬마 천재 덕분이었습니다.

손님이 오면 여관 주인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여기 제 아들이 있습니다. 시를 낭송시킬까요, 초상화를 그리게 할까요?” 아이는 불과 다섯 살이었지만 셰익스피어의 어렵고 긴 시를 줄줄 외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손님들을 더욱 놀라게 했던 건 그림 실력이었습니다. 아이의 그림 실력은 웬만한 어른보다 더 뛰어났거든요. “그대로 앉아 계시면 바로 그림을 그려드리겠습니다.” 똘똘하고 잘생긴 아이가 달려와 이렇게 말할 때마다 손님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고, 그 표정은 몇 분 뒤 그림을 받아 들며 놀라움으로 바뀌곤 했습니다.

그 꼬마 천재가 토마스 로렌스였습니다. ‘많은 유명 인사들이 어린 로렌스의 천재성과 잘생긴 외모, 훌륭한 성품에 감명받았다’는 내용이 여러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유명 인사가 당시 영국 왕립 아카데미 회장이었던 조슈아 레이놀즈였습니다. 로렌스의 아버지는 우연히 여관에 묵게 된 레이놀즈를 알아보고 로렌스의 그림을 보여줬습니다. 레이놀즈는 말했습니다.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하군요. 장래가 유망한 천재입니다.”


로렌스의 재능은 거침없이 발전했습니다. 열 살이 됐을 무렵, 로렌스는 전국적인 유명 인사로 떠올랐습니다. 아직 꼬마였지만 뛰어난 실력과 명성 덕분에 로렌스가 한 달 동안 버는 돈은 1000만원에 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반면 여관은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수완이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로렌스는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됐습니다.

로렌스의 가족은 여관 사업을 그만두고 귀족들의 휴양도시였던 바스로 떠났습니다. 로렌스가 이곳을 찾는 영국의 상류층 휴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더 많은 돈을 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만난 여러 영국의 유명 인사들은 로렌스를 특별히 아꼈고, 자신들의 명화 컬렉션을 베끼며 공부하도록 도와줬습니다. 로렌스에게 그림 기술을 가르쳐준 화가 손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비용은 내가 댈 테니 로렌스를 유학 보내라”는 귀족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벌어 주는 수입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거절하긴 했지만요.
런던에서의 성공, 발목 잡는 아빠

“이제 네 실력은 런던에서도 통할 거야.” 로렌스가 17살이 되던 1786년, 아버지는 런던으로의 이주를 결정했습니다. 로렌스는 초상화를 그리며 돈을 벌면서도, 계속 공부하고 가르침을 구하는 걸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가 왕립 아카데미의 학교를 잠깐 다닌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배울 게 많지 않아서 금방 그만두긴 했지만요. 게다가 그는 성인이 되며 눈에 띄게 잘생긴 외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목소리도 좋았고, 교양도 뛰어난 데다, 운동도 잘해서 어딜 가나 인기 만점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겸손했습니다. 덕분에 런던에서도 그의 명성과 수입은 꾸준히 상승했습니다.

1789년, 마침내 그는 스무 살의 나이로 영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서 올해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으며 ‘슈퍼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영국 최고의 초상화가’ ‘제 2의 레이놀즈’라는 찬사가 그에게 쏟아졌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웠던 것은 그가 왕실 화가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의 성공 시대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비범한 천재 청년.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색채, 표현, 정신에서 앞질렀다.”(퍼블릭 애드버타이저) “내가 이루지 못한 걸 이룰 수 있는 재능.”(조슈아 레이놀즈) 사람들은 그림 실력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그에게 열광했습니다. 10년 전 1기니였던 초상화 가격은 어느새 40기니(약 760만원)까지 뛰었지요. 하지만 로렌스는 돈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럴 돈도 없었지요. 로렌스가 벌어들이는 막대한 돈 대부분은 아버지가 여러 번 사업에 실패하며 진 빚을 갚는 데 들어갔으니까요.

아버지는 번번이 로렌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예를 들어 1792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스물세 살이던 로렌스는 전시회에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 작품을 내놨는데, 이 때 작품의 수준이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평가들의 반응도 싸늘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로렌스에게 말도 하지 않고 조잡한 전시회를 연 뒤 이런 신문광고를 냈습니다. “최고의 화가 로렌스가 최근 전시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다른 형편없는 화가들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난데도 말이지요! 우리가 준비한 전시회에 와서 직접 작품을 보고 공정한 판단을 내려 주세요.”

“아버지….” 신문 광고를 본 로렌스는 귀까지 빨개진 채 얼굴을 감싸 쥐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관련 인물과 비평가들에게 일일이 사과 편지를 보내야 했지요.
내 언니의 남자친구


5년 뒤인 1797년, 로렌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은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로렌스가 스물여덟이 되던 해였습니다. 이 때문에 로렌스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큰 집을 팔고 이사를 갔습니다. 새로 옮긴 동네에는 뜻밖의 인물, 여배우 사라 시돈스가 있었습니다.

로렌스가 사라와 처음 만난 곳은 바스였습니다. 15년 전 13살이었던 로렌스는 스물일곱 살이던 사라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둘은 서로의 재능과 외모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지요. 이후 그들은 런던에서 다시 마주쳤습니다. 각각 잘나가는 화가와 여배우인 만큼 둘은 사교 행사에서 얼굴을 마주칠 일이 많았습니다. 이제 이웃이 된 둘이 반갑게 인사를 나눈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 이제 자주 봐요!”

그런데 사라 뒤로 빼꼼 얼굴을 내민, 두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봤을 때만 해도 작은 소녀였지만 어느새 훌쩍 자란 사라의 두 딸이었습니다. 큰 딸의 이름은 샐리, 작은 딸은 마리아. 언니는 스물두 살, 동생은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사실 처음 로렌스와 사랑에 빠진 건 언니인 샐리였습니다. 샐리는 예뻤습니다. 똑똑하고 예술적 재능도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고 진중했습니다. 잘 어울리는 두 청춘남녀는 같은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다가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머지않아 로렌스는 사라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따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사라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봐온 만큼 로렌스가 최고의 사윗감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렌스의 아버지가 남긴 빚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자네는 그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야. 내가 잘 알지. 하지만 남편이 자네의 빚을 알면 이 결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빚을 다 갚고 오게.” 로렌스는 실망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상황이 엉망진창으로 된 건 동생인 마리아가 끼어들면서였습니다. 마리아에 대해 당시 그녀의 친구가 쓴 일기 중엔 이런 게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마리아의 외모와 매력이 갑자기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다. 인기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원하는 건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마리아는 언니의 남자친구, 로렌스를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로렌스는 유혹에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마리아의 치명적인 매력에 조금은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언니인 샐리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샐리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습니다. 자매 관계를 파탄 내기도 싫었고, 무엇보다도 로렌스가 자신을 떠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대체로 옳은 생각이었습니다. 마리아가 갑자기 병에 걸리지만 않았다면요.

겨울 런던의 춥고 습한 공기, 심각한 환경오염 때문에 마리아는 심한 폐병에 걸렸습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던 마리아는 부모님에게 간청했습니다. “로렌스 씨를 사랑하고 있어요. 로렌스 씨와 약혼하게 해 주세요….” 그녀의 아버지는 그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렌스가 큰딸과 연인이라는 사실을 아예 몰랐던 데다, 어떻게 해서든 작은 딸의 상태가 나아졌으면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좀 황당하게 보이지만, 사라와 샐리도 여기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마리아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칫 거절했다가는 마리아가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날 수도 있을 정도로요. 가족이 죽는 것보다는 연인을 포기하는 게 나았습니다. 로렌스도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하는 걸 가진 행복 덕분이었을까요. 마리아는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싸움은 마리아의 승리로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죽음, 그리고
하지만 로렌스와 샐리는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특히 로렌스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제력을 잃고 사라의 집을 찾아가 애원했습니다. “사실 저는 샐리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샐리와 약혼하게 해 주십시오.” 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원래 로렌스와 샐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요. “뭐라고? 미쳤어? 내 아픈 딸을 버리고, 다른 딸로 바꿔서 약혼하고 싶다고? 당장 꺼져!” 로렌스는 쫓겨났습니다.

그래도 샐리는 로렌스의 마음을 확인하고 기뻐했습니다. 동생의 건강도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로렌스와 몰래 다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라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사정을 다 아시잖아요. 아버지한테 잘 말씀해주셔서 로렌스 씨와 저의 결혼을 허락해 주세요.”

하지만 마리아가 다시 앓아누우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다시 좌절됐습니다. 사실 로렌스와 샐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마리아의 병은 불치병에 가까웠고, 우연히 로렌스와 약혼할 때 상태가 잠깐 좋아진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느낌은 달랐습니다. 로렌스와 샐리는 죄책감을, 마리아는 분노와 좌절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녀는 샐리에게 “로렌스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시켰습니다.


1798년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뒤 두 사람은 다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서로 사랑했지만 둘의 마음속에는 깊은 죄책감이 남았고, 이는 관계를 번번이 꼬이게 했습니다. 서로 솔직하지 못해 자꾸만 오해가 생겼습니다. 로렌스가 샐리에게 실언을 한 적도 있었고, 로렌스가 부잣집 예쁜 딸과 사귄다는 소문에 샐리가 멋대로 토라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803년 샐리도 동생처럼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샐리의 죽음으로 로렌스의 사랑은 끝났습니다. 그의 나이 34세였습니다.
왕과 교황의 화가


로렌스는 사랑도 다른 취미도 없이 계속 그림을 그리고, 명성을 쌓고, 돈을 벌고, 그 돈으로도 감당 못할 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명작들을 사들였습니다. 그가 기댈 곳은 이제 예술뿐이었습니다.

로렌스는 영국의 왕과 공주, 위대한 전쟁 영웅들을 그렸고, 러시아 차르와 프로이센(현재 독일) 왕의 모습을 그렸고, 교황의 모습을 남겼습니다. 유럽 전역을 휩쓴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서 이긴 연합국의 황제와 유명한 장군들이 영국으로 찾아온 덕분이었습니다. 한 평론가(윌리엄스)는 말했습니다. “위대한 예술가에게 이런 특별한 시기를 살 수 있다는 건 정말 엄청난 행운이다.” 덕분에 로렌스는 역사를 기록한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그의 붓이 지나간 자리에서 위인들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게 됐습니다.


1820년에는 영국 화가로서 최고의 영예인 왕립 아카데미 회장에 선출됐고 기사 작위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구멍이 남아있었습니다. 말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부럽다면 내 삶을 기억하라고. 나는 불행히도 아내가 없어. 오랜 고독 때문에 성숙한 삶을 살지도 못하지….”

1829년 겨울, 60세가 된 그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겁니다. 그래도 로렌스는 그림을 그리고 왕립 아카데미 회장으로서의 사교 활동에 성실하게 참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찾은 극장. 열여덟 살 난 신인 여배우를 보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게 됩니다. 여배우가 옛날 자신이 사랑했던 샐리의 모습을 똑 닮았거든요. 그녀의 이름은 패니 켐블, 알고 보니 샐리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었습니다.


로렌스는 급히 그녀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켐블과 그녀의 어머니에게 보여줬습니다. 그 초상화는 사실 실물과 별로 닮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로렌스의 연애사를 대강 들어 알고 있던 켐블의 어머니는 눈치 빠르게 말했지요. “샐리와 마리아를 많이 닮았는데요.” 로렌스는 목이 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그렇죠! 그녀를 아주 많이 닮았어요! 그녀는 그들 모두와 매우 닮았어요!” 다음 해인 1830년, 로렌스는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날, 그는 켐블의 초상화가 그려진 판화 몇 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고 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한 평론가(그레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뒤를 이을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화가였다. 매우 신사답고, 매우 온화한 매너를 지녔고, 겸손하면서도 사교적이었다. 그는 교양이 넘쳤고 예술에 열정적으로 헌신해 방에 걸려 있는 모든 그림을 꼼꼼히 살펴보지 않는 일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로렌스의 초상화에는 그 당시 영국 사회와 역사의 단면이 거울처럼 반영돼 있습니다. 한 평론가(캠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렌스의 그림은 보는 이에게 당시 시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그것도 가장 부유한 저택 응접실 거울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그런 기분.” 그 말대로 초상화는 역사적인 인물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각적 자료이자 시대상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로렌스의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일단 로렌스의 초상화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충분히 보고 즐길 수 있습니다. 워낙 잘 그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의 그림은 “역사적 사실로만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느낌을 준다”(로렌스 전문가 마이클 레비)는 평가를 받습니다. 아마도 그건 로렌스가 누구보다 화려하게 빛나는 사람들을 그리면서도, 그 사람들 속에는 그만큼 깊은 사연과 슬픔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그래서 로렌스의 그림을 계속 들여다보면,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이 마치 이렇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잠깐만. 그냥 보고 지나쳐도 좋아. 그렇지만 시간이 좀 있다면 이리 와 봐. 들려줄 많은 이야기가 있어….” 어쩌면 그건 예술과 역사, 한 인간의 삶, 그리고 화가 자신의 사랑조차 초상화 속에서 모두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렌스의 목소리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i>*이번 기사는 토마스 로렌스와 관련해 가장 권위있는 서적 두 권 'Sir Thomas Lawrence'(Michael Levey)와 'Regency portrait painter: the life of Sir Thomas Lawrence' (Douglas Goldring)을 참조했습니다.
*칼럼을 엮고 더한 책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이 인쇄에 들어갔습니다. 1~2주 내로 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응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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