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의 화가' 이배가 고향 청도에 불지른 사연

입력 2024-03-03 18:55   수정 2024-03-04 00:43


정월대보름을 맞은 지난달 24일 경북 청도의 밤하늘. 어둠을 환히 밝히는 보름달 아래로 강렬한 불길이 치솟았다.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소원을 적은 쪽지가 재가 된 채 흩날렸다. 이들의 간절한 염원은 다음 날 아침, 검고 단단한 숯으로 다시 태어났다.

‘숯의 화가’ 이배의 ‘달집태우기’가 지난달 24일 그의 고향인 청도에서 열렸다.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공식 병행전시로 초청된 작품의 서막이다. 이배의 개인전 ‘달집태우기’는 행사 기간인 4월 20일부터 11월 24일까지 이탈리아 베네치아 빌모트파운데이션에서 개최된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보내온 소원을 모아 전통 한지에 옮겨 적고 달집에 묶어 함께 태웠다. 달집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다음 날 아침 불길이 전소되는 순간까지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영상은 비디오 설치작 ‘버닝(Burning)’이 돼 전시 공간의 첫머리를 장식할 예정이다.

이배의 전시는 청도의 전통의례인 달집태우기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고향에서 풍년과 건강을 기원하던 풍습과 현대 미술이 하나로 엮인 관객 참여형 전시를 표방한다. 전시를 후원한 조현화랑 측은 “인간과 자연의 화합, 채움과 비움의 순환, 자연의 호흡과 리듬 등 만물의 연결됨을 주제로 다룬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라는 비엔날레의 주제와도 상통한다. 지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을 연결하기 때문이다. 전시를 기획한 발렌티나 부찌 큐레이터는 “청도라는 지역성과 그 의례의식에서 떠오른 이배의 달과 숯은 지구 반대편에서 글로벌 참여를 비춰낼 것”이라고 했다.

이배는 30여 년 동안 숯이라는 재료와 흑백의 서체적 추상을 통해 한국 회화를 국제무대에 선보이고 있다. 1990년 프랑스로 넘어간 뒤 서양 미술재료 대신 숯의 물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숯이 가지고 있는 삶과 죽음, 순환과 나눔 등의 태생적 관념에 착안했다. 숯가루를 섞은 먹물로 그린 ‘붓질’, 숯 자체를 형상화한 브론즈 조각 시리즈 등을 제작했다.

이번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는 ‘버닝’을 비롯해 설치작 ‘붓질’, 대형 평면작 ‘불로부터’, 조각 ‘먹’ 등 10여 개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는 “어린 시절 경험한 달집태우기 등 전통 의례의 영향으로 숯의 특성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며 “그 안에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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