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유하다가도 놀랄 만큼 강인한…韓할머니, 비엔날레 울렸다

입력 2024-03-21 18:01   수정 2024-03-22 03:03

누구나 간직하는 ‘할머니의 기억’이 있다. 거칠지만 따뜻한 손길, 소복이 쌓인 밥공기, 마당에서 익어가는 구수한 누룩 냄새…. 인생의 굴곡을 묵묵히 걸어온 할머니들의 굽은 등은 그 자체로 어렴풋한 ‘어떤 시절’을 소환한다.

한국인만 공감하는 건 아니다. 세계 최대 미술 축제인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한국 할머니들의 서사가 계속 환영받고 있어서다. 2019년 비엔날레 본전시에서 강서경 작가(46)의 ‘그랜드마더 타워’가 설치됐다. 다음달 열리는 올해 비엔날레엔 88세 원로작가이자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작품 세계를 이어가고 있는 김윤신이 그 바통을 이어받는다. 두 작가가 각자 삶의 기억을 표현한 방식은 딴판이다. 강서경은 실크와 실을 활용한 회화로 부드러운 굴곡을, 김윤신은 전기톱으로 원목을 깎아 만든 조각으로 단단하고 강인한 성질을 강조했다. 비슷하면서 다른 이들의 ‘할머니 기억’이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마침내 조우했다.


“병중(病中)이셨던 저의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받은 감동도 작품의 동기가 됐어요. 이건 한국인, 특히 한국의 모든 할머니 이야기죠.”

강서경 작가가 5년 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그랜드마더 타워’ 연작을 출품하며 했던 말이다. 작가의 초기 대표작으로, 휘어있는 철사를 색실로 감아 쌓아 올린 조각이다. 민담 속 숱한 아리랑 고개를 넘어온 ‘꼬부랑 할머니’를 연상케 한다. 비틀거리지만 절대 쓰러지지 않는 모습은 마치 히어로물의 캐릭터 같다.

강서경은 힘겨운 삶에도 굴하지 않았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예술혼과 결부해왔다. 지난 19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K3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선보인 ‘정(井)’ 연작도 마찬가지다. 가로 세로 격자를 비단으로 수놓은 회화에는 하루의 시름을 베틀로 짜내는 한 여인의 모습이 비친다. 이름도 얼굴도 나이도 알 수 없지만, 어떤 면에서 여인은 그 시절을 살아간 모든 할머니의 표상으로 해석된다.


1977년생인 강서경은 일찌감치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화여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영국 왕립미술학교에서 유학한 뒤 현재 이화여대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리움미술관, 필라델피아 현대미술관 등 굵직한 무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베네치아·상하이·리버풀 비엔날레 등 국제 미술전에도 이름을 알렸다.

이런 이력을 두고 순탄한 ‘꽃길’만 밟아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201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를 계기로 해외 활동에 박차를 가하던 작가는 불현듯 찾아온 출산, 이어진 두 차례 암 투병으로 인생의 황금기에 작품 활동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지난해 리움미술관 대규모 개인전 ‘버들북 꾀꼬리’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생명력이 감도는 3월을 맞아 행군하듯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의미의 ‘마치(March)’.

대부분 신작 조각과 회화로 꾸려진 이번 전시는 강서경의 주요 개념 ‘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우물 정’ 한자처럼 사각으로 구성된 그의 회화는 조선 세종이 창간한 악보 <정간보(井間譜)>의 기호에서 영감을 얻었다. 음표가 모여 선율을 완성하듯, 각 네모 칸을 수놓은 비단이 모여 일종의 리듬감을 형성한다.

모서리의 부드러운 곡선이 두드러지는 ‘정井-걸음 #02’(2023~2024)에는 할머니에 대한 작가의 기억이 투영됐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은 작가의 할머니는 보행기에 의지해 걷곤 했다고. 둥근 호의 모양새는 이런 보행기의 형태이자, 힘겹지만 묵직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던 노인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또 다른 연작인 ‘모라’는 음정의 최소 단위인 ‘모라(mora)’에서 착안했다. 혼자선 아무 의미를 갖지 않지만, 여러 음정이 섞이는 과정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시간성’에 주목했다. 어느 날 작가는 작업실 바닥에 깔아둔 투명한 아크릴 패널에 튄 물감에 주목했다. 패널을 모아 겹겹이 쌓으며 작품으로서 이름을 부여했다. 극도로 추상화된 이번 시리즈는 그 자체로 작가의 시간을 함축한 일기다. 할머니부터 손녀까지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의 시간’을 공유하기에 최적의 전시다. 지난해 작가의 리움 전시를 인상 깊게 본 관람객이라면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은 요즘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다. 지난 1월 국제갤러리·리만머핀과 공동 소속 계약을 맺으며 생애 처음으로 상업갤러리와 인연을 맺었다. 다음달 17일 열리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처음 리스트에 오른다.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줄곧 남미를 무대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주를 결심한 이유는 남미의 울창한 숲에 반해서다. “나무는 살아 숨쉬고 있어요. 제가 나무의 질감과 색, 무게, 향을 전부 파악해야 하는 이유죠. 좋은 나무를 찾다 보니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에 이르렀네요.”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K1, K2관에서 열리는 개인전은 작가가 다시 한국으로 거점을 옮긴 뒤 선보이는 첫 전시다. 머나먼 타국에서 한국의 주류 미술과 단절된 채 쌓아 올린, 작가의 뚝심을 마주할 기회다. 1970년대 ‘기원 쌓기’ 시리즈부터 1980년대 이후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등 근작까지 51점이 걸렸다.

1935년 이북 땅 원산에서 태어난 김윤신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태평양전쟁 시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작가의 친오빠는 행방이 묘연했다. 설상가상으로 6·25전쟁 피란 과정에선 아버지와도 이별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작가는 유년기의 기억을 더듬으며 ‘기원 쌓기’ 연작을 내놨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나무 조각을 자르고 쌓은 형태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장승, 옛사람들이 기도를 올리던 서낭당 돌무더기 등 전통 소재에서 영감을 얻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에서 질 좋은 원목으로 조각하는 건 꿈 같은 일이었어요. 무너진 가옥의 서까래 등 폐자재를 어렵게 구해다 썼죠.”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철학은 단절과 결합의 끊임없는 순환이다. ‘합이합일 분이분일’ 시리즈가 단적인 예다. ‘서로 다른 두 개가 하나 되고, 다시 이들이 각각 나뉜다’는 뜻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조각에는 나무의 거친 껍질과 부드러운 속살이 한데 어우러진다. 흩어진 가족이 언젠가 다시 모이길 바라는 간절한 ‘기원’을 비유한 것일 수도 있겠다.

조각들은 한국의 돌 쌓기와 남미의 토테미즘이 뒤섞여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국의 민간 신앙에 아르헨티나산 아름드리 목재를 결합했다. 물이 없는 건조한 자갈밭에 자라는 알가로보 나무, 겉껍질이 유독 얇은 팔로산토 나무 등이 단골 소재다.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작가의 실험은 현재진행형이다. 요즘은 작은 나무 조각에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을 칠한 ‘회화 조각’에 몰두하고 있다. 회화 조각엔 작가의 유년기 기억이 반영됐다. 또래가 없던 시골에서 홀로 보낸 어린 시절은 김윤신의 일부가 됐다. 집 울타리 수수깡을 뽑아 색칠하며 놀던 소녀. 백발의 노인이 된 그는 나무 판자에 색을 칠하며 수수깡 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프랑스 유학 1세대, 남미를 떠돌며 스스로 이방인임을 자처한 작가는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주제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와도 맞닿아 있다.

“‘동서남북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지구 전부가 저의 전시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힘이 닿는 데까지 작품을 남기는 게 저의 남은 꿈입니다.”

두 전시 모두 4월 28일까지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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