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다 진했던 '최·장 동맹'…왜 75년 만에 헤어질 결심을 했나

입력 2024-04-07 18:38   수정 2024-04-15 16:37


“지금 그 얘기, 진짜 맞나요?”

2022년 8월 4일. 영풍그룹 오너 장형진 고문은 “한화그룹이 고려아연 유상증자에 참여해 5% 지분을 갖게 된다”는 보고를 받은 뒤 몇 차례나 되물었다. 명색이 고려아연 최대주주인데, 이사회 개최(8월 5일) 하루 전에 통보한 것이나, 이렇게 중요한 안건을 상의조차 안 했다는 게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였다.

신사업 진출 여부를 놓고 조카뻘인 고려아연 3세 최윤범 회장(당시 부회장)과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설마…’란 마음이 앞섰다. 이 모든 얘기가 사실이란 걸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씨 가문과 최씨 가문의 ‘75년 동업’에 커다란 균열이 생긴 순간이었다. 두 가문 간 의견 차는 시간이 갈수록 커졌고 결국 ‘루비콘강’을 건넜다. 최 회장이 이끄는 고려아연은 ‘독립’을 선언하며 서울 논현동 영풍사옥에서 방을 빼기로 한 데 이어 로고도 달리하기로 했다. 지난 2년간 영풍과 고려아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맞손 잡은 ‘황해도 기업인’들
영풍과 고려아연의 복잡한 지분 관계와 속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선 창업 스토리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영풍그룹의 모태는 1949년 11월 문을 연 무역회사 영풍기업사다. 장병희(1913년생) 최기호(1909년생) 등 황해도 사리원 출신 기업인 둘이 공동 창업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 남대문에서 사업을 한 두 사람은 금세 형 동생 사이가 됐다. 영풍기업사 지분 역시 두 사람이 비슷하게 나눴다.

사세를 키울 기회는 1960년대 찾아왔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짓기로 한 국내 1호 비철금속 제련소 사업을 영풍이 따낸 것. 이때 세운 공장이 경북 봉화군에 있는 석포제련소다. 영풍은 “아연 제련소가 따로 있으면 좋겠다”는 박 대통령의 권고에 따라 별도 회사인 고려아연을 세우고, 온산에 제련소를 지었다.

영풍은 고려아연 설립 당시 1억원을 출자해 지분 50%를 가졌다. 나머지 반은 외부에서 조달했다. 고려아연의 초대 사장은 최 창업주가 맡았다. 일본 시장 개척을 위해 일본어에 유창한 최 창업주가 사장이 됐다고 한다. 공동경영 정신에 따라 2대 사장은 장 창업주가 맡았다.

‘동업 정신’은 2대로 넘어갈 때도 그대로였다. 다만 분쟁을 막기 위해 영풍은 장씨가, 고려아연은 최씨가 나눠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이때만 해도 두 회사는 영풍의 지분을 20%대 중반씩 소유했다. 완벽한 공동 경영이었다.

분쟁의 씨앗 된 지분율 변화
현재 영풍그룹 지배구조의 최정점에 있는 영풍의 최대주주는 50.2%를 가진 장씨 일가다. 최씨 일가 보유 지분은 20% 수준이다. 장씨가 거느린 영풍은 고려아연 지분 25.2%를 들고 있고, 장씨 일가가 별도로 6.8%를 갖고 있다. 최씨 일가는 고려아연 이사회를 장악하는 등 경영권은 갖고 있지만 보유 지분은 15.9%가 전부다.

장씨 일가와 최씨 일가가 비슷하게 갖고 있던 지분율이 장씨 우위로 바뀐 건 2000년대 들어서다. 2세인 최창걸 명예회장은 고려아연이 추진한 신사업과 투자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영풍 보유 지분 27%를 장 고문 측에 넘겼다. 하지만 ‘영풍은 장씨, 고려아연은 최씨가 맡는다’는 동업정신에 따라 고려아연 경영은 계속 맡았다. ‘최대주주는 장씨, 경영은 최씨’란 특이한 구조가 형성된 배경이다.

두 가문 간 갈등은 3세 체제로 접어들면서 본격화했다. 두 회사의 3세들은 어릴 적부터 친분을 쌓은 부친과는 달리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1975년생인 최윤범 회장은 학창 시절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1974년생인 장세준 코리아써키트 부회장도 미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지만, 최 회장과 친분을 쌓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두 가문이 엇나간 건 2022년부터다. 최 회장이 신사업을 적극 추진하면서다. 그는 “1세대가 창업, 2세대가 수성에 힘썼다면 나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겠다”며 신재생에너지와 2차전지 소재, 리사이클링(자원 순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큰돈이 드는 사업이다. 그러다 보니 2018년 300억원에 불과하던 차입금이 2022년 1조원을 넘어섰다.

‘무차입 경영’을 원칙으로 삼는 장 고문 측은 이런 공격적인 투자에 여러 차례 반대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경영 간섭으로 받아들인 최 회장도 불만이 쌓였다. 결국 최 회장은 해당 사업을 벌이는 대기업들을 우호지분으로 끌어들였다.
앞으로 어떻게 되나
장씨 측과 최씨 측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율은 엇비슷하다. ‘장씨 일가+영풍’이 32.0%, ‘최씨 일가+우호 지분’은 33.2%다. 두 가문이 결별을 선언한 만큼 ‘지분 확보 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장씨 입장에선 최씨가 이사회를 장악한 만큼 주주총회를 열어 이사회 멤버를 우호 인사로 다시 짜는 수밖에 없어서다. 현재 11명인 고려아연 이사회에 영풍 측 인사는 장 고문 한 명뿐이다.

업계에선 고려아연이 영풍그룹 계열사 중 최고 알짜란 점에서 장씨 측이 쉽사리 내놓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아연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6599억원으로 영풍 계열사 중 가장 많았다. 영풍이 지분을 추가로 사들일 만한 ‘총알’을 갖고 있다는 점도 지분 경쟁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영풍은 2000억원이 넘는 현금을 보유하고 있고, 서울 논현동과 종로에 빌딩도 갖고 있다. 영풍의 부채 비율은 업계 최저인 23.0%다.

최씨 측도 이에 맞설 만한 화력을 갖추고 있다. 현대자동차 한화 LG화학 등 국내 굴지의 기업을 우군으로 두고 있어서다. 업계에선 최씨 측이 추가 유상증자 등을 통해 고려아연 우호지분을 늘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각에선 장씨 측이 소모적인 지분 경쟁 대신 비철금속 시장에서 영풍의 경쟁력을 끌어올려 고려아연과 한판 승부를 벌일 수도 있다는 관측을 내놓는다. 장 고문 측이 임원들에게 “더 이상의 확전은 자제하자”고 말한 것도 이런 전망에 힘을 보태고 있다. 영풍과 고려아연은 아연과 납 제련 등 대부분의 사업 영역이 겹친다. 주력 제품인 아연 제련량은 고려아연이 연 88만t으로 영풍(32만t)보다 두 배 이상 많다. 고려아연이 “영풍은 비철금속 시장에서 동업자가 아니라 경쟁자”라고 선언한 만큼 출혈 경쟁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

고려아연이 영풍그룹에서 계열분리를 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공정거래법상 계열분리를 위해서는 주식 보유 비중을 상호 3% 미만으로 줄이고, 겸임 임원도 없어야 한다. 영풍이 보유한 고려아연 주식을 되사는 방법이 있지만 3조원 넘는 자금이 필요한 데다 장 고문 측이 팔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성상훈/김우섭/김형규 기자 up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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