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 전 이 땅을 해마다 공포에 떨게 한 전염병은 ‘장질부사’와 ‘두창’ 같은 질병이었다. 의료시설은 낙후돼 있고, 위생도 열악하던 시절이었다. “장질부사 발생이 165인 내에 사망한 자 25인이요, … 두창 발생이 2047인 내에 사망한 자 539명이요, 천연두 환자 제일 다수하다더라.” 1920년 조선일보는 7월 14일 자에서 6월 한 달간 경기도의 전염병 발생 현황을 자세히 전했다.‘장티푸스’는 티푸스(typhus)균이 장(腸)에 들어가 일으키는 병이란 뜻으로, ‘장’과 ‘티푸스’를 합성한 말이다. 이를 중국에서 ‘腸窒扶斯’로 적고 [창즈푸쓰] 정도로 읽던 것을 우리 한자음, 즉 음역어로 읽은 것이 ‘장질부사’다. 로스앤젤레스를 ‘나성’이라 하고, 프랑스를 ‘불란서’라 말하는 게 음역어 방식에 따른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익히고 말하는 ‘미국, 영국, 독일, 태국’ 같은 게 다 그렇게 우리말 체계에 들어왔다.
당시 ‘장질부사’가 얼마나 무서운 병이었는지 나중에 ‘염병’의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염병(染病)’은 두 가지로 쓰인다. 하나는 글자 그대로 전염병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장티푸스를 가리킨다. ‘염병’에서 ‘염(染)’은 ‘물들 염’ 자다. ‘물들다, 옮기다, 적시다’란 뜻이다. 그래서 ‘염병’이라 하면 원래 전염성이 있는 병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옛날엔 장티푸스가 최악의 전염병이라 생각돼 ‘염병’ 하면 곧 장티푸스를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즉 고유명사가 일반명사화한 셈이다. 언어에서 단어의 이 같은 진화 현상은 흔한 일이다. 가령 버버리가 곧 트렌치코트를 말하고, 샤프펜슬이 가는 심을 넣어 그것을 밀어내 쓰게 만든 필기도구를, 지프차가 비슷하게 생긴 자동차를 가리키는 말의 대명사가 된 게 모두 그런 일반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수사학적으로는 제유법의 일종인 ‘환칭’에 해당한다.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염병’은 일상의 언어에도 깊은 영향을 끼쳐 ‘염병을 떨다’(엉뚱하거나 나쁜 짓을 하다)란 관용구도 생겨났다. 흔히 “염병할!”이라고 하면 욕으로 하는 말인데, ‘장티푸스를 앓다 죽을’이란 속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염병하다”라고 하면 글자 그대로는 ‘전염병을 앓다’란 뜻이지만, 이보다는 주로 욕하는 말로 (어떤 상황이나 대상이) 아주 못마땅할 때 쓰는 말로 바뀌었다. 단어의 ‘의미확대’인 셈이다.
흔히 쓰는 말에 ‘학을 떼다’라고 하는 것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생긴 표현이다. ‘학(학질)’은 말라리아란 병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그래서 ‘학질 귀신을 몸에서 떼어내다’란 의미에서 ‘괴롭거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느라 진땀을 빼거나, 그것에 질려버리다’란 뜻을 가리키게 됐다.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