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작곡가 밀리 발라키레프가 작곡한 ‘이슬라메이’는 난도가 지나치게 높은 나머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스크랴빈이 이 곡을 연습하다가 오른손을 다치기까지 했다. 모리스 라벨은 이 곡의 명성을 듣고 더 어려운 곡을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피아니스트의 ‘철인 3종 경기’라고 불리는 ‘밤의 가스파르’가 탄생했다.
‘밤의 가스파르’를 포함해 라벨이 작곡한 피아노곡 전곡을 180분에 걸쳐 연주하는 일은 철인 3종 경기보다 수백㎞에서 수천㎞를 달리는 울트라마라톤에 비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만큼 한 무대에서 전 곡이 연주되는 일이 드물기도 하거니와, 매 연주에서 피아노는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을, 가장 센소리와 여린 소리를, 가장 빠른 속도와 느린 속도를 내야 한다.
불협화음의 거친 음표로 시작한 ‘세레나데 그로테스크’에서 조성진은 피아노의 울림을 확인하는 듯 자유자재로 음의 무게를 조절하며 연주를 이어 나갔다. ‘고풍스러운 미뉴에트’에서는 우아하게 미끄러지면서도 탄력 있는 리듬 표현으로 이날 공연에서 펼쳐질 장면들을 예고했다. 전반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연주였다. 라벨은 “왕녀를 위한 죽은 파반느”가 아니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돼야 한다며 연주가 너무 느려지거나 감상적으로 되는 것을 경계했다. 조성진은 수채물감으로 그린 세밀화처럼 섬세하게 연주를 이어갔는데, 음이 쉬어가는 순간의 공기마저 끌어 쓰며 곡 전체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어진 ‘물의 유희’ 연주에서는 곡에서 요구하는 리듬을 정확하게 드러내며 반짝이는 소리를 펼쳐나갔다. 이 곡에서는 연주자에 따라 표제인 물을 표현하는 방식이 제각각이다. 조성진은 물이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느낌보다 무수한 규칙 속에 일렁이는 물의 표면을 그리는 듯했다.
연주 중 처음으로 손수건을 들어 얼굴과 건반을 훔친 조성진은 사뭇 다른 온도로 ‘밤의 가스파르’ 연주를 이어 나갔다.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타건으로 시작한 ‘온딘’ 연주에서는 반짝이는 윤슬을 연상케 하는 순간을 만들었다. ‘교수대’에서는 오른손으로 신중하게 종소리를 울려대며 라벨이 악보 어딘가에 숨겨놨을 곡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장난스러운 요정처럼 자신이 지닌 모든 마스크를 보여주는 듯한 격정의 악장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얕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세션에서는 오랜 시간 공연에 함께 집중해준 관객을 위해 안부를 전하는 듯한 ‘하이든 이름에 의한 미뉴에트’로 시작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에서 조성진은 특유의 우아한 터치와 완급 조절로 곡의 완성도를 높였다.
2곡 ‘푸가’에서는 자칫 건조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특유의 따뜻한 음색으로 감싸줬다. 쿠프랭의 무덤은 춤곡으로 이뤄진 작품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세상을 뜬 친구들을 애도하는 곡인 만큼 일말의 우수의 감정을 남겨두는 것도 중요하다. 조성진은 음량 조절에 신경 쓰며 악장들 고유의 생동감을 살리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애도의 감정을 살피기도 했다. 마지막 악장인 ‘토카타’를 앞두고 잠시 피아노에서 떨어져 호흡을 가다듬은 조성진은 탄력을 잃지 않고 질주해 마지막 음표를 울리며 객석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세 시간에 걸친 공연 독주회는 피아니스트뿐 아니라 객석에서도 상당한 인내심과 체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날 공연에는 대부분의 청중이 마지막 울림까지 집중하고, 열화와 같은 박수로 완주에 성공한 피아니스트를 격려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거장이 탄생하는 10년의 역사에는 그 연주에 같이 침잠할 수 있는 관객이 있었음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조원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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