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은 기후변화 대응과 자원순환을 위해 ESG 규제 범위를 기존 조직에서 제품 단위로 확장하는 새로운 규제 프레임을 도입하고 있다. 기존 환경·사회 규제는 주로 법인 단위 중심으로 설계돼 복잡한 글로벌 가치사슬에서는 실질적 검증과 실행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공급망이 다수 국가와 기업을 횡단하는 상황에서 개별 조직 단위 규제로는 환경적 책임의 추적성과 법적 구속력이 떨어진 것도 이유로 지목된다.
EU는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을 산업 전략의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 제품 단위의 ESG 정보 검증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고강도 규제와 무역 기준으로 정착시키려 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제품 여권(DPP)은 EU가 강점을 지닌 디지털 식별 기술, 데이터 추적 시스템, 인증 인프라 등을 결합해 정보 기반의 비관세 장벽을 제도화하는 핵심 도구로 기능한다.
현재 DPP의 법적 기반인 에코디자인 규정(ESPR)은 지속가능성을 주로 제품의 환경적 특성에 따라 정의한다. 원재료 구성, 에너지 효율, 탄소배출, 유해 화학물질 포함 여부, 재사용·재활용 가능성 등이 포함되며, 향후 노동조건, 인권 존중 등 사회적 지속가능성 요소로 확대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DPP 제도의 규제적 성격과 시장 메커니즘
ESPR은 DPP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모법(母法)으로서 제품 단위 지속가능성을 구조화된 디지털 방식으로 검증하고, 시장 내 정보 비대칭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규제적 기반을 제공한다. 구체적인 법적 요건과 기술 사양은 위임입법(Delegated Act)을 통해 마련될 예정이며, 2024년 말 초안을 마련한 후 2025년 최종 승인, 18개월 유예기간을 거쳐 제품군별로 단계적 시행에 들어간다. 적용 대상은 배터리 제품을 시작으로 섬유·의류, 전기·전자제품, 철강 및 건축자재 등으로 점차 확대되며, 2030년 이전까지는 주요 제품군 전반에 DPP 적용이 의무화될 전망이다.
DPP 제도의 핵심은 단순한 법적 의무화가 아닌 시장 메커니즘과 연계된 구조로 설계됐다는 것이다. 회계감사나 기술 실사 제도처럼 일정 자격을 갖춘 제3자 기관을 통해 수행되며, 해당 기관이 특정 요건을 충족해야 시장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라이선스 기반 질서를 형성한다.
ESPR 제11조 위임입법 초안은 DPP 서비스 제공자에 대한 법적 정의와 자격 요건을 명시하고 있으며, 제조업체나 수입업체가 직접 수행할 수 없는 데이터 보관, 정보 보안, 접근 통제, 장기적 관리 등 기술적 요건을 독립된 제3기관이 책임지는 구조를 택하고 있다.

기업 경쟁 구조의 3대 변화 요인
1. 제품 지속가능성 법적 책임성 강화
DPP는 제품 단위 지속가능성을 법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체계로 작동한다. ESG 정보가 조직 단위 자율 보고를 넘어 제품 단위에서 객관적 근거와 제3자 검증을 요구하는 새로운 법적 책임 구조로 전환됐음을 의미한다. EU는 DPP를 통해 제품의 환경적 속성을 시장 접근의 전제 조건으로 설정하며, 이는 단순한 준법 리스크가 아닌 시장 진입 자체의 경쟁 조건을 새롭게 정의하는 구조적 변화를 초래한다.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단순 수출 규제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에서 거래 지속성과 시장 차별화 여부를 좌우하는 핵심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기술 검증을 수행하는 제3자 서비스 제공자 요건이 규제화됨에 따라 인증받지 못한 제품은 사실상 시장 접근이 불가능해지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2. 글로벌 밸류체인 중심의 데이터 기반 정보 관리 체계 요구
DPP 제도는 제품 단위 지속가능성 정보를 글로벌 밸류체인 전반에서 수집하고, 이를 정형화된 방식으로 구조화·검증하는 정보 관리 체계를 요구한다. 각 제품별로 설계·제조·유통·사용·폐기 등 전 생애주기에 걸친 실시간 환경 데이터를 추적·기록·보관·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급망 내 참여자의 디지털 격차, 정보 공유에 대한 민감성, 시스템 간 상호운용성 부족 등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난도가 매우 높다. 복수의 1차·2차 협력사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DPP 서비스 제공자를 통해 등록·검증해야 하는 구조는 단일 기업 차원에서 감당하기 어려우며, 산업 단위 또는 지역 단위 협업형 데이터 인프라가 필수적이다.
3. 디지털 전환 가속화와 기술 역량 기반 ESG 경쟁 체계 전환
DPP 제도는 공급망 전반에 걸친 지속가능성 검증을 기술 기반으로 실현하는 구조다. 그 실행의 성공 여부는 규제 요건을 직접 수행하는 서비스 제공자의 신뢰성과 역량 확보에 달려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DPP 규제 대상 기업과 서비스 제공자 간 전방위적 파트너십을 통한 데이터 검증 시스템 구축이 필수다. 블록체인, 클라우드 기반 데이터 저장소, 디지털 트윈 등의 기술은 DPP의 핵심 수단이자 ESG 경쟁 체계 전환을 가능케 하는 기술적 기반으로 작동한다. 이는 ESG가 단순한 보고·공시 중심의 수동적 체계에서 벗어나 디지털 기술과 정보 검증을 중심으로 한 능동적 경쟁 구조로 재편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업의 전략적 대응 방향
제품 지속가능성 검증이 제품 단위로 이동하면서 기업은 더 이상 조직 차원의 ESG 관리만으로는 규제에 대응하기 어려운 시대에 직면했다. 제품의 지속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설계 단계부터 전 과정의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구조화된 형태로 검증 가능하도록 관리해야 한다.
이는 기업 내부의 데이터 흐름 전반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하는 전환을 의미하며, 기존의 재무·운영 중심 시스템에서 벗어나 제품 단위 환경 데이터를 중심으로 하는 정보 인프라의 구축이 요구된다. 또 ESG나 마케팅 부서만이 아닌 연구개발, 품질관리, 구매, 법무, IT 등 전사적 협업 체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국내 기업은 DPP를 단순한 새로운 EU 규제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제품 경쟁력, 브랜드 신뢰, 공급망 포지션을 재정의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 조직구조, 데이터 흐름, 외부 협업 전략 전반에 걸친 종합적 대응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로써 DPP는 단순 규제를 넘어선 글로벌 무역의 새로운 질서이자 ESG 실현의 실질적 도구로 작동한다. 기업은 이를 단순 대응이 아닌 선제적 전략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며, 제품 단위 정보 관리 체계와 글로벌 인증 네트워크 연계 전략을 병행할 때만 규제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다. 결국 ESG는 ‘보고의 문제’가 아닌 ‘디지털 기술·정보·신뢰’ 문제로 재편되고 있으며, 그 첫 번째 시험장이 바로 디지털 제품 여권이다.
유준혁 한국 딜로이트 그룹 One ESG 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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