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夏至), 긴긴 낮에 만난 시인들
-김달진문학관 '시야, 놀자!' 참관기
이서린 시인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이 긴 하지(夏至). 하지란 말은 동지(冬至)란 말 만큼 섧게 다가오는 말. 낮이 길면 길어서, 밤이 짧으면 짧아서 왠지 모를 애틋함이 있어 입술로 되새겨 본다. 그래서일까? 6월 21일 하지에 만난 <시야, 놀자!>에 비가 내렸다.
진해의 김달진문학관이 ‘찾아가는 시인, 찾아오는 시인’이라는 표어로 <시야, 놀자!>를 한 지는 올해로 19년째, 52회를 맞았다. 전국 각지의 시인과 경남 지역 시인을 각각 초대하여 독자와 시인이 만나는 자리이다. 그동안 <시야, 놀자!>에서 초대한 시인은 100명이 훌쩍 넘는다. 나는 초대 시인으로도 참석했고 사회자로도 참석하였는데, 오늘은 관람객이면서 독자로 김달진문학관을 들어섰다.
2025년 6월 21일 토요일 오후 3시, 제52회 <시야, 놀자!>의 초대 시인은 고두현 시인과 김승강 시인이다.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라니.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어 좋고, 시를 만나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다.
김달진문학관에 간다는 말은 초록의 들판을 만난다는 말. 창원시 진해구 웅동(소사동)에 위치한 문학관은 주변에 논과 들, 산이 있어 자연을 그대로 만끽할 수 있다. 시원해지는 눈과 편안해지는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벼가 자라는 논엔 곳곳에 깃발처럼 백로가 서 있다. 저 흰 깃발이 지키는 논밭을 지나면 마을과 어우러지는 김달진문학관과 김달진 시인의 생가가 나온다. 이 무렵이면 생가엔 샛노란 비파가 주렁주렁 달려 관람객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뿐인가. 생가 마당 안쪽에 자리한 태산목꽃의 자태와 향기가 기품있게 주변을 밝힌다.
김달진문학관의 이성모 관장님과 심화선 학예사님, 문학관 주변 정리와 궂은일을 맡아 하시는 모혜분 집사님의 자상함과 세심함은 김달진문학제나 <시야, 놀자!>를 개최할 때마다 드러난다. 오늘도 역시 그 면모를 보여주었다. 비파나무 열매를 한 소쿠리 따다가 깨끗이 씻어 종이컵에 담아 참석자들이 맛보게 하였다. 태산목꽃은 옹기 뚜껑에 물과 함께 담아 시인과 사회자가 대담하는 탁자에 올려, 그 향기가 문학관 세미나실에 은은히 퍼지게 하였다. 김달진문학관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시야, 놀자!> 시간이 가까워지자 초대 시인인 고두현 시인이 먼저 도착하였다. 서울 쪽에 있지만 남해의 시인에 어울리게 시인은, 남해 물빛을 닮은 옷을 입고 들어섰다. 이성모 관장님과 <시야, 놀자!> 사회를 맡은 채수옥 시인, 일찍 도착한 지역의 시인들이 고두현 시인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고두현 시인이 도착한 후, 오늘의 초대 시인인 김승강 시인도 들어섰다. 김승강 시인은 경남 창원에서 활동하는 시인이다. 검은 티셔츠와 모자를 쓴 시인은 우람한 나무, 혹은 바위를 연상시키는 아우라를 가졌다. 말을 안 하면 쉽게 말 걸기가 어려운 인상이지만, 김승강 시인만큼 솔직하고 순수한 시인은 드물다고 생각한다. 두 시인의 이야기가 김달진문학관을 출렁이게 하리라.
오후 3시, 김달진문학관의 세미나실은 오랜만에 독자와 지역의 시인으로 가득 찼다. 6월의 복판에서 시인과 독자가 만나는 공간은 하지(夏至), 말 그대로 천정까지 시에 대한 설렘이 차올랐다. 김달진문학관 이성모 관장님의 <시야, 놀자!> 목적과 기획 의도 설명 후 사회자의 인사로 막이 올랐다. 진행은 각 50분씩 1부와 2부로 나눠서 했는데 김승강 시인이 1부 초대 시인이었다.
김승강 시인은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2003년 「문학 · 판」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흑백다방』, 『기타 치는 노인처럼』, 『타임지를 읽는 경비』 외 여러 권과 산문집 『노인을 기다리며』도 내었다. 시집 출간도 많이 했고 시도 잘 쓰는데, 상복이 없는 시인 중 한 명이다. 먼발치에서 김승강 시인을 볼 때, 그는 정직하고 눈치 안 보고, 문단 권력에 편승하지 않는 순수한 시인이다.
나는 예전부터 그가 산모퉁이 우뚝 선 고독한 바위 같다고 생각하였는데, 시인은 자신을 슬픔의 시인이라 소개하였다. 시인이면서 아파트 경비원인 김승강 시인은 자전거와 기타와 술을 좋아한다. 자전거와 술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예전에 만났을 땐 이제 기타는 외면했다고 하였다. 그가 기타를 다시 안아주기를 바란다.
사회를 맡은 채수옥 시인과 김승강 시인이 시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진해가 고향이 아니지만 진해를 사랑하고 진해 흑백다방과 적산가옥을 이야기한 김승강 시인의 시. 8편의 대표시와 6편의 근작시가 자료집에 수록되었지만 시간 관계상 다 듣지는 못하였다. 수록된 시는 시인의 육성으로 듣기도 하고 참여한 지역 시인이 낭독하기도 하였다. 사회자가 시에 대한 설명을 요청할 때 김승강 시인은 자신의 시는 설명이 필요 없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 느끼라고. 시에 굳이 철학을 논하지 말라고.
아, 역시 김승강 시인이었다. 별것 없는 자신의 시를 거창하게 봐주길 바라는 시인이 있다. 유독 자신만이 시를 어렵게 쓰고 숱한 밤을 고민하는 것처럼 말하는 시인도 있다. 그러나 김승강 시인은 단호하게 말하였다. 철학은 무슨! 그냥 읽으시라고.
그의 시를 듣고 이성모 관장은 “설렁설렁 쓰는 것 같아도 읽으면 슬픔이 느껴지는 게 김승강 시인의 시”라고 하였다. 그중 시인의 시 <수습> 전문을 여기 옮긴다.
‘소주 두 병을 놓고/ 통닭 한 마리를 수습했다/ 수습한 뼈를/ 분리수거용 비닐봉투에 넣고 골목 어귀에 내놓았다// 골목길 자동차 밑을 전전하던 굶주린 고양이가 와서/ 비닐봉투를 뜯고/ 다시 수습했다// 고양이가 뜯어놓은/ 비닐봉투를 아내가 수습했다// 아내는 내가 다시 수습했다// 쓰레기 수거차의 종소리가/ 가까이 들려왔을 때/ 죽은 아내는 부엌에서 도마를 두드리고 있었고/ 나는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있었다// 배부른 고양이 자동차 밑에서 나와/ 장의차를 향해 묵념했다’
1부가 끝나고 10분 휴식 후 고두현 시인의 2부가 시작되었다. 고두현 시인은 2024년 제35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자다. 수상 시집은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다. 남해에서 태어난 시인은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한국경제신문에서 문화부 기자와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 문화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워낙 유명한 시인이지만 약력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김달진문학상을 비롯하여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유배문학특별상 등을 수상했고 많은 시집을 출간하였다. 그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와 『늦게 온 소포』가 독자와 시인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다.
2부를 시작하면서 고두현 시인은 인사말로 “하지에 비가 내리면 풍년이 든다는데, 오늘은 저녁까지 비가 오므로 올해 내내 풍요로울 것 같다”고 하였다. 하지에 비가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곳곳에 문을 닫는 점포와 절망에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조금 더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시를 들었다.
사회자가 고두현 시인에게 자료집에서 가장 들려주고 싶은 시를 낭독해달라 부탁하자 시인은 <내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때>를 낭독하였다. 시인은 실제로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60여 년 전, 집도 절도 없이 낙향한 시절, 어머니는 남의 집 소마구간에 짚을 깔고 시인을 낳았다. 주인집 산모와 한 지붕 아래에서 출산할 수 없다는 풍습 때문이었다.
부모와 여동생, 네 식구는 벼랑 끝을 버티다가 어머니의 기도와 궁리 끝에 남해 금산의 작은 암자로 들어가 살았다. 적어도 밥은 굶지 않을 것이므로. 시인은 나무도 하고 고사리도 캐면서 절밥을 먹고 자랐다.
<남해 가는 길-유배시첩 1>이란 시를 이야기하면서 시인은 남해가 문학적 상상력의 모태라 하였다. 남해는 큰섬이 작은섬 창선을 품고 있는 모양이라,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남해는 시인에게 어머니였다. 노도를 바라보면서 자란 아이는 훗날 서포 김만중문학상을 받았다.
<늦게 온 소포>라는 시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범람하는 눈물을 어쩌지 못해 잠시 자리를 벗어났다. 복도에서 진정시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으나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시인의, 지독하게 가난했던 시절과 끝내 스님이 된 시인의 어머니를 생각하자 가슴엔 연신 빗물이 흘렀다. 아마 다른 독자도 그랬으리라.
하지가 여름 태양의 절정이라면 시인의 이야기는 궁극에 다다른 슬픔으로 독자를 울렸다. 그 시절을 다 겪고 나면 저런 얼굴이 되는구나. 나는 곰곰, 고두현 시인의 얼굴을 보았다. 깊은 바닷속 같은 시인의 목소리가, 한 장소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래 멀리 갈 물결처럼 조용하고 힘이 있었다. 여기 시인의 시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를 옮겨 적는다
‘늘 뒤따라오던 길이 나를 앞질러 가기 시작한다./ 지나온 길은 직선 아니면 곡선/ 주저앉아 목 놓고 눈 감아도/ 이 길 아니면 저 길, 그랬던 길이/ 어느 날부터 여러 갈래 여러 각도로/ 내 앞을 질러간다.// 아침엔 꿈틀대는 리본처럼 푸르게/ 저녁엔 칭칭대는 붕대처럼 하얗게/ 들판 지나 사막 지난 두 팔 벌리고/ 골짜기와 암벽 지나 성긴 돌 틈까지// 물가에 비친 나뭇가지 따라 흔들리다가/ 바다 바깥 먼 항로를 마구 내달리다가/ 어느 날 낯빛을 바꾸면서 이 길이 맞느냐고/ 남 얘기하듯, 천연덕스레 내 얼굴을 바라보며/ 갈래갈래 절레절레// 오래된 습관처럼 뒤따라오던 길이 갑자기/ 앞질러 가기 시작하다 잊은 듯/ 돌아서서 나에게 길을 묻는 낯선 풍경.’
<시야, 놀자!>는 단순히 시만 읽는 게 아니다. 우리는 시인을 읽고, 시인이 보냈던 시절을 읽고, 시인이 걸어온 길을 읽었다. 한 사람을 읽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길. 그 길이 너무 멀지는 않기를.
<시야, 놀자!>가 끝났다. 유월의 여름 하지. 문학의 풍요를 기약하는 세찬 비가 내렸다.

■ 이서린 : 경남 마산 출생. 199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저녁의 내부』, 『그때 나는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등이 있다. 김달진창원문학상, 형평지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경남문학 편집장, 김달진문학관 꿈다락 강사, 시문학연구회 <하로동선> 회원.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