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군이 10월에 빈을 떠난 뒤, 그해 말 베토벤은 이 협주곡을 완성했다. 이후 세부 수정을 거쳐 1811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초연은 큰 호평을 받았지만, 그때 이미 그는 거의 청력을 상실한 상태여서 연주도, 지휘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운명에 내려진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도 예술을 향한 의지로 완성된 이 작품. 그러나 정작 그 스스로는 자신의 곡을 들을 수도 없으니, 그 순간 그의 심정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총 3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곡은 웅장하고 영웅적인 1악장을 지나, 고요하고 명상적인 2악장, 그리고 마지막 3악장에서는 자유와 기쁨의 환희가 느껴지는 승리감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이다. 전 세계 주요 무대에서 가장 사랑받는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로, 곡 자체의 존재감은 물론이거니와, 거의 모든 피아니스트의 레퍼토리에 빠지지 않기에 연주자마다의 해석 또한 색다른 감상의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지난 6월, 매릴랜드 스트라스모어 공연장에서 예핌 브론프만(Yefim Bronfman)의 ‘황제’ 협주곡 공연이 있었다. 1958년생인 그는 나이를 잊게 할 만큼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에서 클래식 공연 정기권을 구매하려고 하면 그의 공연은 거의 모든 주요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그의 연주를 관람하게 된다.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인 그의 연주를 이렇게 자주 만날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다.

처음 무대에서 그를 보았을 때, 그랜드 피아노가 작아 보일 만큼 거대한 체구와 과묵한 인상이 눈에 들어왔다. 피지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힘, 그리고 그런 힘을 통제하는 절제력, 거기에 과장없는 해석은 그의 연주를 더욱 견고하고 깊이 있게 만들었다. 몇 번의 커튼콜에도 앵콜 없이 무대를 내려가던 그의 모습 또한 그날의 연주처럼 절제되고 품격있는 모습으로 내 기억에 오래 남아있었다.
이번 공연을 보기 전, 나는 브론프만의 ‘황제’가 박진감 넘치는 연주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절제된 힘으로 정밀하게 조율된 연주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고수의 아우라는 숨겨지지 않는 법. 그 큰 손이 나비처럼 건반 위를 누비며 만들어내는 맑고 섬세한 소리에는 수정처럼 맑고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마치 일부러 고음을 내지르지 않는 가수처럼, 절제된 표현으로 완벽한 다이내믹을 그려낸 그의 연주에서, 명상하듯 고요히 산책하는 거인의 위엄이 느껴졌다.
브론프만이 한국에서 9월 21일 롯데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 내한 공연을 한다는 기사를 봤다. ‘황제’ 협주곡은 아니지만, 이번 기회에 그의 연주를 직관해 보시길 권해본다. 아직 나는 그의 앵콜곡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한국 클래식 관중의 젊고 뜨거운 에너지에 어쩌면 그가 이번에는 앵콜곡을 연주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되기도 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클라우디아 아라우(Claudio Arrau). 브론프만의 ‘황제’ 공연 얼마 후, 동네 헌책방 음반 코너에서 그의 ‘황제’ 협주곡 CD를 발견했다. 브론프만처럼 평생 왕성한 연주 활동을 했었던 아라우는, 이미 유튜브에는 여러 가지 버전의 ‘황제’ 연주가 올라와 있다. 하지만 CD를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고음질의 음악을 듣는 것 이상의 만족감을 준다. 그 음악가와 작품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동시에 그 음악을 소유한다는 기쁨을 온전히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99센트라는 가격표를 달고 있다면, 어찌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내가 처음 들었던 아라우의 연주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이른바 월광 소나타였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들었을 익숙한 곡이지만, 아라우의 연주로 들었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의 연주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를 넘어서는 깊이가 있다. 철학적 사유가 깃든 듯한 울림, 중후하고 무게감 있는 소리, 그 소리가 공간을 채우며 퍼져 나갈 때 느껴지는 공명감... 모든 음이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던 그 순간의 느낌은, 내 평생 잊히지 않을 연주로 가슴에 남아있다.
아라우의 ‘황제’는 편안했다. 기세로 압도하는 화려한 연주가 아닌, 중후함이 느껴지는 품격있는 연주였다. ‘황제’라는 이름 뒤에 숨은 고뇌를 표현하듯, 사색의 깊이를 소리로 풀어낸다. 이제는 그의 연주를 직관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던 나 자신이 유감스럽지만, 그래도 남겨진 영상과 앨범들에 감사하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 부지런히 공연 관람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흔히 연주자들은, 인간이 신에게 기도하듯 작곡가에게 연주를 바친다고 한다. 브론프만의 ‘황제’, 아라우의 ‘황제’가 그런 연주였다면, 우리가 따라간 그들의 연주 끝에는, 귀가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도 세상의 소리를 음악으로 그려내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며 운명을 이겨낸 작곡가, 베토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고지현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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