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느리를 소개할 땐 임윤찬을 빼놓을 수 없다. 임윤찬은 지난 3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이하느리의 곡 ‘라운드 앤드 벨버티-스무드 블렌드’를 세계 초연으로 연주했다. 이 피아니스트가 스승인 손민수와 함께 한 7월 공연에서도 이하느리 작품이 있었다. 슈트라우스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 수록된 곡들을 피아노 듀오로 편곡한 버전이었다. 임윤찬은 공연에 앞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를 두고 “신이 선택한 음악가”라고 칭하기도 했다.
19세 천재 작곡가의 매력에 빠진 건 임윤찬만이 아니었다. 지난 6월 26일 세종문화회관에선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이 이하느리에게 위촉했던 곡을 연주했다. 이 악단은 그에게 상주작곡가 자리도 맡겼다. 7월 3일엔 예술의전당이 이하느리 위촉곡을 선보였다. 두 공연 모두 최수열이 지휘봉을 들었다. 최수열은 이하느리의 2024년 작품인 ‘미뉴에트’의 재생 버튼을 누르고 30초도 안 돼 곡을 맡겨야겠단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원초적인 리듬으로 기선제압
이하느리가 음악가들을 홀린 비결을 알고자 그가 쓴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위촉곡부터 들여다봤다. 이 악단의 공연인 <장단의 재발견>에서 이하느리가 쓴 위촉곡의 이름은 ‘언셀렉티드 앰비언트 루프스 25-25’. 에이펙스 트윈의 앨범인 ‘셀렉티드 앰비언트 웍스 85-92’를 오마주 한 제목이다. 에이펙스 트윈은 1971년 영국에서 태어난 일렉트로닉 프로듀서로 앰비언트 장르의 개척자로 불린다. 앰비언트는 음색의 공간감을 극대화하는 장르다. 그간 음악에서 부차적으로 여겨졌던 환경음(애트모스피어)을 살리는 게 특색이다.

이하느리의 곡명을 풀어쓰자면 ‘작곡가의 의도적인 선택 없이 제작된 앰비언트 풍의 루프를 반복한 곡’이다. ‘25-25’는 작품 제작 연도다. 곡의 구성은 40분 길이 7개 악장. 첫 악장엔 ‘인트로덕션(소개)’란 제목이 붙었다. 연주의 시작은 침묵 속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천둥소리였다. 빠르게 음량을 키워나가는 서양 타악기들 사이로 북이 세게 한 번 울리면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식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우렛소리는 점점 템포를 당기며 무대에 격렬함을 더했다.
반복되는 천둥에 귀가 익숙해졌을 즈음 꼴깍거리는 가벼운 타격음이 잇따르며 4초 남짓한 리듬을 반복했다. 루프였다. 루프는 일정한 마디를 계속 반복하는 연주법이다. 일반적인 멜로디와는 달리 반복되는 구간의 길이가 짧다 보니 유려한 맛은 떨어진다. 대신 원초적인 리듬이 두드러지는 게 매력이다. 이 연주법에 맞춰 현악기도 색다른 연주법을 택했다. 거문고는 현을 튕기는 대신 채로 괘(현의 받침대)를 가볍게 긁어가며 소리를 냈다. 가야금은 바이올린 활처럼 생긴 물체를 현에 때렸다. 농부가 보리를 타작하는 모습 같았다.
우연적이지만, 교묘한 환경음
2악장은 ‘느린 악장’이란 제목이 붙었다. 1악장의 속도감과는 거리를 두는 이름이었다. 무대 뒤편의 연주자들은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보이는 기다란 물체를 빙빙 돌리며 바람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앰비언트에서 쓰이는 환경음이었다. 이 소리는 악장 내내 별다른 연주가 없을 때 무대를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해금은 현을 하나씩 튕기는 아르페지오 주법으로 통통거리는 음을 냈다. 일렉트로닉 장르에서 쓰이는 플럭과 비슷했다. 제목이 따로 없던 3악장은 무대 한가운데에 있던 양금이 주도했다. 양금 속주는 하프시코드를 치는 듯했다.

가장 별났던 건 4악장이었다. 여기선 악단이 연주하지 않았다. 공연 1·2부를 나누는 인터미션처럼 관객들이 쉴 시간을 이하느리가 악장 형태로 마련해 둔 것이었다. 무대 조명은 꺼졌다. 무대 한편에 세워진 스크린에서 4분이 남았음을 알려주는 디지털 시계가 나타났을 뿐이었다. 시계가 0분이 되면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긴장감 속에서 관객들은 옆 사람과 소곤소곤 대화하며 숨을 돌렸다. “이 공연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뒷사람의 말에선 그가 받았을 충격이 느껴졌다. 깜깜한 무대에선 5~8초 간격으로 박 소리 비슷한 딸깍거림이 나왔다. 이하느리는 관객에겐 쉬라고 했지만 이것도 루프였다. 무대의 침묵과 관객의 웅성거림은 우연적 요소를 살린 환경음이었다.
5악장은 사물놀이를 보는 듯했다. 앞서 쌓인 루프들이 휘모리 장단처럼 흥겨움을 쏟아냈다. 타악기가 신명 나게 루프를 만들어내는 사이 피리가 간결한 멜로디를 붙여 분위기를 띄웠다. 다시 앰비언트의 매력이 두드러진 6악장을 지나 등장한 7악장은 프랑스 작곡가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에서 쓰인 리듬을 재현한 것으로 보였다. 이하느리가 연주에 앞서 관객들에게 “초등학생 시절에 접했던 이국적 선율”이라고 표현했던 리듬이었다. 그만큼 다른 악장보다 멜로디가 뚜렷했다. 관객들이 어깨를 덩실거리면서 새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하느리의 가로 본능
일주일 뒤에도 이하느리는 또 다른 신곡을 공개했다. 예술의전당은 2023년부터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란 이름으로 새로운 현대음악을 들려주는 공연을 선보여왔다. 최수열은 올해 첫 공연의 주인공으로 이하느리를 낙점하고 그에게 타악기 협주곡을 의뢰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의 이름은 ‘As if.......I’. 3개 악장으로 이뤄진 약 10분 길이 곡이었다. 공연 시작 전부터 파격이었다. 이 곡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북 설명엔 단 한 문장만 적혀있었다. “As if... I had a plan”.


설명에 당황했을 관객들을 위해 최수열은 공연에 앞서 무대 뒤편에 영상을 띄워 신곡을 소개했다. 영상에서 인상 깊었던 건 악보였다. 통상 악보엔 음표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하느리의 악보엔 콩나물같이 생긴 게 좀처럼 안 보였다. 대신 뒤집힌 기타 그림과 코스피 지수처럼 등락을 반복하는 직선들이 오선보에 줄줄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직관적으로 알아볼 만한 기호는 1악장의 제목인 ‘X-섹션’ 이었다.
연주를 시작한 건 타악기 연주자인 김은혜의 기타였다. 기타는 옆으로 세운 뒤 음에 따라 높낮이를 바꿔가며 현을 튕겨 연주하는 게 일반적이다. 기하학적 관점으로 보면 높이의 척도인 Y축을 기준 삼아 연주하는 쪽이다. 반면 김은혜는 기타를 눕혔다. 그러곤 유리컵처럼 생긴 물체를 현과 평행한 방향으로 스윽 긁어가며 타악기처럼 소리를 냈다. 빨래판 위에 놓인 옷감을 빨랫비누로 문지르는 모습이었다. 현과 평행한 X축의 움직임이 두드러지면서 음의 높낮이 변화는 무의미해졌다. 다른 악기도 연주법의 축이 달라졌다. 수직으로 건반을 두드려 연주하는 하프시코드는 두피 마사지용 머리긁개를 써서 옆으로 현을 긁듯이 연주하는 수평 악기가 됐다. 마림바도 채를 수평으로 움직여 건반을 긁는 식으로 소리를 냈다.

입체파 이하느리
2악장 제목인 ‘로우 폴리(low poly)’도 신곡 해석의 실마리였다. 로우 폴리는 3D 컴퓨터 그래픽에서 데이터 단위로 쓰이는 폴리곤의 수가 적은 상태다. 폴리곤이 많을수록 묘사가 정확해지지만 처리해야 할 데이터의 양이 많아진다. 폴리곤의 수가 줄면 해상도가 떨어진다. 전체 그림의 의미도 불분명해진다. 대신 폴리곤 하나의 크기가 커지는 효과가 생기다 보니 폴리곤 각각의 존재감이 뚜렷해진다. 음악으로 대응하면 곡 전체의 맥락 대신 재료로 쓰이는 소리 하나하나가 존재감을 드러내는 상태다.
‘로 폴리(raw poly)’란 제목이 붙인 3악장이나 2악장이나 모두 멜로디로 볼 만한 선율은 없었다. 들리는 건 색다른 연주법으로 탄생한 소리들과 불규직한 음들의 연속이었다. 중간중간 두드러진 건 공중에 돌려 소리를 내는 튜브 모양 장난감인 훨리 튜브였다. 바람 소리를 환경음으로 더해 다른 악기들의 음색을 돋보이게 만드려는 장치였다. 이렇듯 이하느리의 음악은 그의 발상을 가늠해보는 맛이 있었다. 그의 선율에선 별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키는 공간 구도에 맞춰 새로운 소리를 풀어놓는 방식에 있었다. 하나의 피사체를 여러 각도로 담으려 했던 피카소가 생각나는 곡이었다.

뒤이어 연주된 곡인 비토 주라이의 곡 ‘런어라운드’도 소리를 풀어가는 발상이 재밌었다. 주라이는 1979년 슬로베니아 태생으로 최근 이하느리가 가장 빠져있다는 작곡가다. 런어라운드 연주는 동물이 하는 음악 같았다. 동물을 묘사하거나 동물 소리를 재현해 인간의 곡을 만드는 쪽은 아니었다. 동물이 주체가 돼 만든 음악이 어떠할지를 보여주는 쪽에 가까웠다. 소의 방귀 소리 같은 게 튀어나오기도 했다. 연주 말미엔 타악기 주자들이 지휘자 주위로 몰려들어 낙타가 침을 뱉는 듯한 시늉을 했다. 소리로 침을 맞은 최수열의 얼굴엔 당혹감보다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이 기분은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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