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그룹 최초의 여성 임원’이란 수식어의 주인공 윤여순 전 LG아트센터 대표(70). 그는 대기업에서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요즘 현역 때 못지않은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대기업 리더들을 이끌며 ‘코칭 전문가’로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윤 전 대표는 결혼 뒤 미국으로 건너가 육아와 박사 과정을 병행하다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기업에 몸담았다. 대기업에서 여성 리더는커녕 여성 팀장도 드물던 시절 LG인화원 부장·상무·전무를 거치며 HR(인적 자원) 분야의 혁신을 주도했고, LG아트센터 대표로서 예술 경영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퇴임 후엔 ‘코치로서의 삶’이라는 또 다른 ‘처음’에 도전하고 있다.
‘대기업 최초 여성 최고경영자(CEO)’의 길을 연 그는 이제 고군분투 중인 후배 여성들의 내면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더 나은 리더십과 조직 문화를 위한 여정을 함께하고 있다. 그를 서울 예장동 ‘카페허블’에서 만났다.
▷요즘 코칭 일을 하고 계신다고요. 은퇴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2014년 LG아트센터 대표에서 퇴임했으니 10년쯤 됐어요. 2년 정도 고문 타이틀이나 달고 있다가 끝나겠거니 했는데, 지금은 비즈니스 코칭이 본업이 됐죠. 대기업 임원들을 주로 코칭하고 강의도 해요. 제2의 인생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HR 분야에서 일하면서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도 많이 했지만, ‘내가 이들을 정말 성장시킨 걸까’ ‘내 역할을 충분히 한 걸까’라는 회의가 있었어요. 그러다가 코칭 리더십을 접하면서 ‘아, 이거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죠. 은퇴 후 국제 코칭 자격증을 땄고, 지금은 코칭경영원에서 파트너 코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제 코칭 자격증이 따로 있군요.
“네, 자격증을 따려면 2년 정도 걸려요. 공부 삼아 시작했는데, 기업 내 수요가 커지면서 계속 일이 들어오고 있어요. 대기업 임원들은 성과 압박이 심한데, 일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결국 일하는 건 ‘사람’이니까, 그 사람들과 씨름하고, 관계를 맺고, 신뢰를 주고, 동기를 부여하는 게 중요한데, 그게 정말 쉽지 않아요. 그래서 코칭이 더 중요해졌죠. 이 일이 절박한 사람들에게 진짜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껴요.”
▷직접 쓰신 책 <우아하게 이기는 여자>는 많은 커리어우먼에게 공감을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쓰게 되셨나요.“2000년 LG인화원 상무가 됐을 땐 그저 잠깐 있다가 나올 줄 알았어요. 하지만 ‘여기서 살아남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진짜 열심히 일했어요. 그렇게 상무로 10년을 일한 끝에 전무가 됐어요. 남자였다면 그 정도 실적이면 3년이면 승진했을 거예요. 하지만 여자는 아무도 밀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10년 만에 당시 구본무 회장께서 ‘윤 상무 이제 전무 한번 시켜주면 안 되겠느냐’고 주변에 물으셨어요. 딱히 문제도 없고 일은 잘했으니 남성 임원들이 차마 반대는 못한 거죠. 이후 LG아트센터 대표까지 맡고 퇴임했어요. 그 무렵 후배가 책을 쓰라고 권하더군요. 처음엔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혼자 겸손한 척 빼는 것도 좋은 태도는 아니에요’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마음에 찔렸어요.”
▷‘우아하게’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나요.
“과거엔 남성 중심 조직에서 여성이 살아남으려면 ‘남자처럼’ 일해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정말 나다운 방식인가 의문이 들었죠. 여성으로서 나다움을 지키며 리더로 설 수 없을까. 물론 쉽진 않았어요. 품격 있게, 여유 있게 상황을 이끌고 때론 조율하며 나아가는 법을 익히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지금은 여성 후배들에게 말해요. ‘남자만큼 잘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고요. 그들을 따라잡는 게 인생의 목적이 되어선 안 돼요. 자신만의 방식으로 길게 보고 가라고. 그게 진짜 ‘우아하게 이기는’ 방식이니까요.”
▷TV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 출연이 큰 화제가 됐습니다.
“제 언니(배우 윤여정)가 아카데미 후보로 지명됐을 때였어요. 언니와 관련한 요청인 줄 알고 거절했지만, 주변에서 꼭 나가야 한다고 해서 용기 냈어요. 방송에서 ‘육아를 두려워하지 말라. 잘 키우면서 일도 잘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많은 여성에게 울림을 준 것 같아요. 이후 여성 대상 강의는 최대한 빠지지 않으려고 해요. 강의장에서 한두 명은 꼭 울어요. 그만큼 조직 생활이 여성들에게는 아직도 힘들다는 뜻이겠죠. 언젠가 남성만 있는 자리에서 ‘여성 인재를 어떻게 쓰는 게 진짜 리더십인지’ 강의해보는 게 소원이에요.”
▷여성 직장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육아를 두려워하지 말고 일하러 나오라’는 거예요. 우리나라 여성은 교육 수준이 높지만, 그 고급 인력이 사회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어요.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교육시킨 여성 인재들이 아이 ‘교육’에 발목 잡혀 주저앉는 거예요. 아이 하나를 위해 엄마가 인생을 거는 이 구조는 언젠가 대가를 치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을까? 회의적이에요. 창의성과 독립심은 경험과 자율성 속에서 자라나는 건데, 엄마가 모든 걸 붙들고 있으면 아이는 오히려 위축돼요. 엄마도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아이에게 가장 좋은 교육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남성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고요.
“지금 높은 자리에 있는 남성들도 어머니, 누나, 아내 등 가족의 희생 덕분에 그 자리에 왔어요. 그런데 조직 안의 결정권은 여전히 남성 중심이에요. 이제는 여성을 조직 안에서 제대로, 적극적으로 써야 해요. 한국 여성은 유능한데, 리더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예요.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남성들이여, 여성 인재를 써 주세요. 당신들이 개인적으로 성과를 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 이 사회에서 아무도 하지 않은 일,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일을 해보세요. 그게 진짜 리더십이고, 그것이야말로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유산입니다. 한국 여성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스스로 해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성과를 보여줄 겁니다. 그러니 믿어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분위기가 싸해지는 걸 느껴요. 남성들이 불편해하죠.”
▷추천 책을 몇 권 부탁드리겠습니다.“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여성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책을 제가 좋아하는 것 같아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제 인생의 고전입니다. 소름 끼치도록 섬세한 인간의 심리 묘사가 압도적이죠.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인간, 그들이 펼쳐가는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혼불>은 한국 문학사에 여성작가 최명희만이 혼을 불살라 그려낼 수 있었던 독보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 양반사회의 기품, 평민과 천민의 고난과 애환을 생생하게 묘사한 대하소설이에요. <진리의 발견>은 30대 젊은 여성이 쓴, 800페이지가 넘는 벽돌 책인데 완전히 빠져들어 읽었어요.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 특히 여성과 성소수자 얘기가 많은데, 그들의 삶과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약한 다양한 인물을 연결해서 보는 관점이 독특합니다. 꼭 소개하고 싶은 책이에요.”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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