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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고고학자가 발굴한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유물

입력 2025-07-29 17:18   수정 2025-07-30 01:09


존재는 세월 앞에 유한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형태는 닳고, 색은 바래기 마련. 어느 순간 이름까지 잊힌다. 밀로의 비너스는 두 팔이 없는 채로 서 있고, 황동빛 위용을 자랑했다던 자유의 여신상은 140여 년의 호흡 끝에 청록색으로 산화했다. 신라 시대 얼굴무늬 수막새는 반쯤 얼굴을 잃은 채 흙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유한하다고 해서 언제나 소멸로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다. 퇴색과 상실은 때때로 본질을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사람들은 이를 ‘예술’이라 부르고, 예술을 담은 그릇을 ‘유물’이라 이름 붙인다. 사라진 팔의 모습을 상상하며 새삼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색깔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의 의지를 되새기며, 반쪽짜리 얼굴에서 은은한 ‘천년의 미소’를 발견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 현대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 다니엘 아샴(사진)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는 자신의 조각과 오브제를 부수고 침식시켜 현재의 사물을 옛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지금의 사물이 미래의 유물로 남았을 때, 그 안에도 여전히 예술적 가치가 담겨 있을까’라는 질문이 시작점인 것.

서울 청담동 페로탕 서울에서 열리는 다니엘 아샴의 개인전 ‘기억의 건축’에선 이런 아샴의 예술적 세계관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작가 특유의 미적 개념인 ‘상상의 고고학’을 회화와 조각, 드로잉으로 풀어냈다. 전시에 나온 작품을 두고 페로탕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대 조각을 연상시키는 형상과 현대 문명의 오브제가 공존하는 작품들은 마치 미래 고고학자가 발굴한 유물처럼 다가옵니다.”

1980년 미국에서 태어난 아샴은 쟁쟁한 현대미술계에서도 이른 나이에 두각을 드러낸 작가로 꼽힌다. 이미 뉴욕은 물론 파리, 런던 등 세계 각지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작품 활동을 선보여 왔다. 활동 영역은 미술에 머물지 않는다. 퍼렐 윌리엄스(음악), 디올(패션), 티파니(주얼리), 포르쉐(자동차) 등 글로벌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아 협업하는 등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전 영역에서 자신의 미감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그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가다. 2017년 페로탕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했고, 지난해 서울 신천동 롯데뮤지엄에서 출품작만 무려 250여 점에 달하는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지난해 롯데뮤지엄 전시에 비하면 페로탕 개인전의 규모는 다소 옹색해 보일 수 있다. 출품작이 몇 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도 다시 발걸음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번 전시에는 아샴의 가장 최근 작품들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상상의 고고학’이 어디쯤, 어떻게 왔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장소인 셈이다.

전시에서 눈에 띄는 작품은 ‘Amalgamized Venus of Arles(아말감화된 아를의 비너스)’(2023)다. 높이가 2m에 달하는 조각상으로, 아샴이 루브르박물관에서 수년간 생활하며 제작한 작품. 고대 조각상을 1 대 1 비율로 재현한 루브르의 수많은 석고상 복제 컬렉션을 자유롭게 눈에 담아 완성한 결과물이다.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조각상 같지만 아샴답게 석고 물성이 아닌 고광택 스테인리스스틸, 마치 수백 년에 걸쳐 녹이 슨 것처럼 산화 처리한 청동, 따뜻한 색감으로 연마한 청동을 재료로 삼은 게 흥미롭다. 지중해에서 갓 건져 올린 듯한 질감을 보여주면서도 고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재료를 사용해 독특한 조형적 긴장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산화된 청동과 스테인리스 스틸의 반듯한 경계는 마치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층위를 시각화한 것처럼 다가온다.

눈여겨볼 또 다른 작품은 올해 새롭게 선보인 흉상 연작 중 하나인 ‘Stairs in the Labyrinth(미궁의 계단)’(2025)다. 그간 아샴이 공개한 작업물 중에서도 가장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주조 방식으로 제작한 ‘캐스트샌드’ 모래 조각인 이 작품은 흉상에 대한 역사적 전례를 참조하면서도 동시대적 사고, 디지털 시대의 제작 기술을 보여주는 요소를 도입해 완성했다. 핸드 드로잉으로 조각을 구상한 다음 디지털 렌더링과 컴퓨터를 활용한 3차원(3D) 프린팅을 통해 입체적으로 구현한, 고대성과 현대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작업이다. 작품은 여성의 두상 안에 요르단의 보물 페트라처럼 고대 건축물 같은 공간이 자리 잡은 모습을 하고 있다. 미로처럼 얽힌 구조와 그 속을 오르내리는 몇몇 인간의 모습은 마치 네덜란드 판화 거장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의 ‘상승과 하강’(1960)을 보는 것 같다.

고대성과 현대성이 교차하는 아샴의 작업은 향후 현대성과 미래성의 교차로 진화할 예정이다. 전시장 한편, 일본풍 분재 화분에 오디오 스피커를 결합한 습작이 이를 암시한다. 자세히 보면 소나무처럼 보이는 나무의 잎이 소리를 전달하는 구리 선이다. 낭만주의와 팝아트 사이에 자리한 장난스러운 그의 세계관은 고고학자에서 미래학자로 바뀌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시는 8월 16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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