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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조명 속, 유령이 부른 변주...브리튼 오페라 '나사의 회전'

입력 2025-08-01 08:25   수정 2025-09-03 09:45



“말로, 말로.” 카운터테너가 가성으로 유령 퀸트를 부르는 주문을 반복해 외치는 순간, 푸른 조명이 무대를 덮었다. 차갑고 음산한 분위기가 극장을 감싸고, 날카로운 화성의 음악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섬뜩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지난달 30일 평창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벤자민 브리튼의 오페라 <나사의 회전>(Turn of the Screw)이 국내 초연했다. 미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동명 고딕 호러 소설을 바탕으로, 대본가 마이패니 파이퍼가 각색한 이 작품은 오페라로는 드물게 인간의 공포와 심리적 불확실성을 다룬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콘서트버전으로 공연된 이 작품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괴기스러운 스토리로 유명하다. 2막으로 구성된 이 오페라는 프롤로그로 시작해 총 16개 장면의 서사가 마치 변주곡처럼 연결되는 음악을 통해 전개된다. 브리튼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비롯해 문학 걸작을 오페라 무대에 올리는 데 깊은 관심을 보인 작곡가다. 그는 이 작품에서 유령에 사로잡힌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점점 광기 어린 집착에 빠지는 한 가정교사의 심리를 정교한 음악과 함께 그려냈다.

이 작품의 초연 소식에 국내 음악계 관계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대관령 음악제 양성원 예술감독을 비롯해 아드리앙 페뤼숑, 정민 등 지휘자를 비롯해 성악가, 평론가 등 전국의 수 많은 음악인이 평창으로 모여들었다.



작품의 중심축 역할인 '유령을 부르는 아이' 마일스 역으로 분한 카운터테너 정민호는 보이 소프라노가 주로 소화하는 역할을 겨냥한듯 한 해맑은 표정연기와 절제된 가성으로 청중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특히 “말로, 말로”라는 주문을 반복하며 초점 없는 눈빛으로 유령 퀸트와 교감하는 장면에서 그의 표정 연기는 장내에 앉은 관객이 숨 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섬뜩했다.



가정교사 역을 맡은 아일랜드 출신 소프라노 에일리시 티넌은 명확한 딕션과 균형 잡힌 발성으로 노래했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저택에 온 따뜻한 교사가 죽은 퀸트와 제셀에 대한 집착에 빠져 마일스를 죽음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한 인물의 내면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유령 퀸트 역의 아일랜드 출신 테너 로빈 트리칠러는 불규칙한 조성과 넓은 음역을 유려하게 소화했다. 검은 의상을 입고 등장한 미스 제셀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정미는 음산한 분위기로 쓰여진 음악을 더딘 음량의 진행으로 노래하며 오싹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로스 부인 역의 소프라노 서선영은 풍부한 음량과 섬세한 디테일을 살린 표현으로 노래하며,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죽은 자들에게 현혹되지 않는 강한 인간상을 선보였다.



연출을 맡은 조은비는 블루 톤 조명과 무대 공간의 음영 대비를 통해 삶과 죽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퀸트와 제셀이 무대 2층 합창 석에서, 마일스와 플로라는 객석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응시하며 노래하던 장면은 공간을 뛰어넘는 연출의 백미로, 객석 전체가 극 속으로 끌려 들어간 듯한 순간을 연출했다.

지휘자 조나단 스톡해머는 브리튼이 설계한 16개의 장면의 음악을 단일한 극적 긴장 속에 유기적으로 엮어냈다. 각 장면의 시작과 끝은 여운을 살려 이끌었고, 유령이 출몰하는 장면에서는 마이너 풍의 피치카토, 트레몰로, 얇은 현악기의 파편 같은 음형을 활용해 관객에게 심리적 공포감을 조성했다. 13인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는 성악과 반주의 유기적인 결합이 핵심인 브리튼의 음악을 밀도 있게 재현해냈다.

오케스트라에서는 피콜로와 플루트의 솔로를 예민하고 섬세한 음색으로 연주한 김유빈이 빛났다. 클라리네티스트 김한은 클라리넷과 베이스 클라리넷을 깊은 호흡으로 연주하며 극의 서늘한 정서를 지탱했다. 비올리스트 율리아 데이네카, 피아노와 첼레스타를 맡은 마그누스 로드가르드의 솔로 역시 각 장면마다의 분위기 전환을 매끄럽게 만들었다.

브리튼의 음악은 단지 성악에 맞춘 반주가 아니라 장면과 동작, 감정이 긴밀히 얽힌 하나의 ‘심리적 유기체’처럼 작동한다. 바그너의 유도동기를 연상시키는 반복적 선율과 인물 중심의 변주 기법은 극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적 라인을 형성한다. 특히 1막 제1변주곡 ‘The Welcome’에서, 마일스와 플로라가 각각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장면에서는 하프 글리산도와 타악기의 트레몰로가 고음에서 저음으로 떨어지며 인물들의 동작을 소리로 그려냈다. 음악과 몸짓이 하나로 이어지는 이 장면은, 브리튼이 얼마나 정교하게 자신의 음악극을 설계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나사의 회전>은 단순한 유령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과 환상의 경계를 탐색하게 만드는 '음악 심리극'이다. 결국 아이를 지키겠다는 가정교사의 집착과 아이를 차지하려는 유령의 유혹 사이에서 마일스는 죽음을 맞는다. 비극적 결말로 끝이 나는 이 작품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게 만든다. 바로 그 모호함 때문에 이 오페라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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