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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생존의 디자인

입력 2025-08-03 17:59   수정 2025-08-04 00:10

러시아 캄차카반도에서 규모 8.8의 강진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73년 만의 대지진이라고 한다. 태평양 ‘불의 고리’에 접한 나라들이 일제히 긴장했다.

그 순간 오래전 일본 유학 시절 한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흔들림, 쓰러지는 책장 그리고 친구가 손전등을 비추며 외친 한마디. “이쪽이야!” 그 짧은 순간이 내게 말해줬다. 안전은 우연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디자인 속에 있다는 것을….

지진처럼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막을 수는 없어도 대비할 수 있다. 안전 디자인은 그 대비의 언어다. 일본은 동일본대지진 이후 도시와 건축의 설계 철학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건물 내진 기준을 강화하고, 피난 동선은 단순화했다. 안전디자인이 생활에 스며든 것이다.

“디자인이 생명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장식에 불과하다.” 빅토어 파파네크의 말이 떠오른다. 필자 역시 우리나라에서 안전디자인의 필요성을 절감한 순간이 있다. 경북 구미에서 불산 유출 사고가 발생했을 때다. ‘디자인이 방관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이 의식을 흔들었다.

그때 필자는 산업단지 안전디자인연구과제에 착수했다. 위험물 저장소와 생산라인 배치를 시각화하고, 비상대피 안내와 경로를 직관적으로 설계했으며, 안전 표지판과 색채를 국제 기준에 맞춰 표준화했다. 로드맵까지 수립한 이 연구는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단지 안전디자인의 첫 단추가 됐다. 그 과정에서 나는 ‘생존을 위한 디자인’의 무게를 온몸으로 깨달았다.

네덜란드는 홍수에 대비해 도시를 재설계했다. 로테르담의 광장과 주차장은 평소엔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위기 시에는 빗물을 가두는 저장소로 변한다. 스웨덴 스톡홀름 지하철역의 은은한 조명은 재난 시 바닥과 벽을 따라 빛의 화살표로 바뀌어 피난 방향을 안내한다. 언어가 필요 없는, 본능을 자극하는 설계다. 얼마나 멋진 디자인인가.

안전디자인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위기 순간 인간의 판단력은 평소보다 훨씬 떨어진다. 그래서 표지판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자마자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첨단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즉시 반응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 순간의 생사를 가르는 것은 직관이다.

안전디자인은 개인이나 지방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국가 차원의 ‘국민 생존 안전디자인 매뉴얼’을 재정비해야 한다. 재난 유형별 대피 동선 설계, 표지판과 색채·기호의 전국 표준화, 건축물 안전 진단과 보강 지침, 공공공간의 비상 전환 설계, 생활 속 비상키트 보급이 포함돼야 한다. 학교, 병원, 역사, 산업단지, 대형 상업시설에 의무 적용하고 정기적인 시민 체험 훈련을 해야 한다.

안전디자인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아름다움보다 먼저 생명을 지켜야 한다. 재난의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길을 잃지 않아야 한다. 생존의 디자인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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