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초부터 슛 들어간 영화가 하나도 없어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살면서 대역배우로 활동하던 게오르기 일리치(47)는 최근 영화 촬영이 없어서 우버 운전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24년 전 배우의 꿈을 꾸며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온 그는 4일(현지시간) 웨스트할리우드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만나 "영화 산업이 완전히 죽었다. 이렇게 일을 찾기 힘든 상황은 살면서 처음"이라고 전했다.
초창기 할리우드의 모습을 다룬 영화 『바빌론(2022년)』에서 가상의 유명 배우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분)는 할리우드를 "세상에서 가장 마법같은 곳"이라고 묘사한다. 1920년대부터 영화 산업의 중심지로 거듭난 할리우드는 돈과 명예, 욕망이 몰리는 장소였다. 그러나 최근 이곳에 쇠락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무성 영화 배우 콘래드가 유성 영화의 등장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듯,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도 글로벌 OTT 서비스의 확산으로 사상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비영리단체 필름LA에 따르면 지난 1분기 LA에서 촬영된 영화·텔레비전(TV) 총 촬영일수는 5295일로 전년 대비 22.3% 감소했다. 2022년 대비로는 46.1% 감소했고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포함해도 역대 최저 수준이다.

미국 대표 영화제작사인 파라마운트픽처스를 포함한 파라마운트글로벌이 스카이댄스미디어에 80억달러(약 11조원)에 인수된 사례는 미국 영화산업이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영화 오프닝 장면에 등장하는 스위스 마테호른산으로 유명한 파라마운트픽처스는 영화『대부(1972)』『탑건(1986)』『타이타닉(1997)』등을 제작한 미국 대표 영화사다. 1990년대 연이은 히트작을 내놓으며 2000년 한때 주가가 1020억달러(약 141조원)에 달하던 미디어 제국이 10분의1도 안 가격에 팔린 것이다.
110년 역사의 비주얼이펙트(VFX) 전문기업 테크니컬러도 지난 2월 파산을 신청했다. 이 회사는 컬러영화의 시초 격인 『오즈의 마법사(1939)』를 시작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라이언킹(1994)』, 미국 아카데미 촬영상 수상작인『1917(2020)』등의 시각효과를 담당한 전통의 기업이다. 테크니컬러가 파산함에 따라 할리우드에 있는 수많은 VFX 하청업체들도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글로벌 OTT 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할리우드에서 컨텐츠를 생산, 다른 국가로 전파하는 비즈니스 구조가 경쟁력을 잃은 결과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시장조사업체 더넘버스에 따르면 미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박스오피스 매출 기준)은 2010년 90%가 넘었지만 지난해 69.85%로 쪼그라들었다. 넷플릭스, 아마존프라임비디오, 디즈니플러스(+) 등 OTT를 중심으로 아시아와 유럽 등 각지에서 만들어지는 컨텐츠가 세계로 유통되면서다. 김민영 넷플릭스 아시아태평양 지역 콘텐츠 VP는 지난 6월 국내 강연에서 "훌륭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든 만들어지고 있고 전 세계에서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신념이 증명되고 있다"고 했다.

미국 배우·작가들이 벌인 대규모 파업의 영향도 할리우드를 강타하고 있다. 2023년 3개월 이상 파업을 벌인 영화배우-텔레비전·라디오방송인조합(SAG-AFTRA)은 당해 최저임금을 7% 올렸고 2024년에는 4%를 추가 인상했다. 이 외에도 일당 요금을 60달러에서 70달러로, 공연자들의 의상 수당이 18달러에서 27달러로 상승하는 등 각종 수당과 보너스도 인상됐다. 이러한 임금 인상분은 이전에도 물가가 높았던 할리우드의 제작사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제작사들이 할리우드를 이탈하는 조짐을 보이자 미국 각 주는 이들을 잡기 위한 '지원 경쟁'에 나섰다. 텍사스주는 영화 제작 세액공제액을 2년에 한번씩 2억달러씩 늘렸는데 지난 6월에는 이를 3억달러로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위스콘신주는 지난달 3일 각 제작사에 최대 500만달러의 세액공제를 법안하는 법안을 처리했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 역시 지난 5월 주 의료서비스 및 공립대학 지원을 삭감하면서도 영화·TV 프로그램 세액공제액을 3억300만달러에서 7억5000만달러로 증액했다. 뉴섬 주지사는 "(캘리포니아주의) 영화 산업이 생명유지장치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로스앤젤레스=김인엽 특파원 insid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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