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베니스 리도섬 해변을 따라 걷다 보면 ‘팔라쪼 델 시네마(영화의 궁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매년 여름 끝무렵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인 베니스 국제 영화제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가장 극적인 무대가 된다. 거장 감독들과 스타 배우들이 레드카펫을 밟고 전 세계 ‘씨네필’과 만나는 영화제의 심장부이기 때문이다.
27일(현지시간) ‘제8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가 막을 올린 팔라쪼 델 시네마엔 40여 개의 영화제 공식 참가국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걸렸다.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요 영화 생산지인 만큼 매년 게양돼 왔지만, 이날 마주한 태극기는 예년보다 유난히 힘차게 펄럭였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경쟁 부문에 초청되면서다. 박 감독이 이 곳에 깔린 레드카펫을 밟는 순간, 13년 만에 황금사자상 경쟁에 복귀한 한국 영화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깃발로 의미를 되찾는 것이다.
칸, 베를린보다 올해는 베니스
베니스는 프랑스 칸, 독일 베를린과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묶이지만, 국내 영화 애호가들에겐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았다. 고(故) 김기덕 감독이 2012년 ‘피에타’로 황금사자상을 받은 뒤론 한국영화와 인연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꿈의 무대’로 각인된 칸이나, 홍상수 감독의 단골무대이자 사회·정치적 이슈와 예술적 실험에 강점을 보이며 한국 독립·예술영화 진영과 맞닿아 있는 베를린과 비교하면 대중적 관심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올해는 다르다. 한국 영화계의 이목이 온통 베니스에 쏠리고 있다. 봉준호 감독과 함께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꼽히는 박 감독이 신작을 들고 베니스를 찾았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 새 주요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 수상은 커녕 작품도 초청받지 못하며 ‘K-영화’가 무너진다는 우려 속에서 들린 단비 같은 소식이다. 칸 영화제 단골손님이라 ‘깐느 박’이란 별칭이 붙은 박 감독이 ‘베니스 박’으로 변모한 것도 흥밋거리다. 박 감독이 베니스 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린 건 2005년 ‘친절한 금자씨’ 이후 20년 만이다. 박 감독은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등 출연배우들과 작품이 공식 상영되는 오는 29일 레드카펫을 밟을 예정이다.
박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인 ‘어쩔수가없다’는 미국 소설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도끼>를 원작 삼아 박 감독만의 영화적 미장센을 섞은 작품이다. 중년 회사원 만수(이병헌 역)가 덜컥 해고된 후 가족의 안정적인 생활을 지키려 재취업을 결심하고 구직 경쟁자를 제거하는 이야기가 얼개다. 오래전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애정을 쏟아 완성한 만큼, 베니스 영화제도 눈여겨 봤다. 알베르토 바르베라 영화제 예술감독은 앞서 “박찬욱은 올해 초청작 명단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감독”이라고 했다.
‘어쩔수가없다’ 수상 기대감도↑
수상 가능성을 점칠 만한 시그널도 감지된다. 월드프리미어(세계 첫 공개) 공식 상영이 프라임타임으로 불리는 금요일 밤 황금시간대에 배치됐단 점에서다. 상영시간이 수상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제를 찾은 전 세계 언론과 시장 관계자, 영화 애호가들이 가장 주목할 시간에 상영시간표를 짠 것 자체가 베니스가 올해 전면에 내세울 작품 중 하나로 택했다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실제로 2023년 영화 ‘가여운 것들’이 영화제 금요일 프라임타임에 상영됐고, 이 해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현지 기대감도 상당하다. ‘어쩔수가없다’가 올해 영화제의 테마인 ‘괴물’과 어울린다는 점에서다. 앞서 바르베라 예술감독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올해의 영화제 ‘필 루즈(fil rouge·실마리)’는 괴물과 마주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어쩔수가없다’ 현대 사회의 보이지 않는 괴물을 은유했다는 점에서 경쟁작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테마에 부합한다는 관측이다.
경쟁은 만만치 않다. 올해 경쟁 부문 초청작은 21편이다. 이 중 황금사자상을 받은 경험이 있는 감독의 작품만 세 편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가 눈길을 끈다. 장준환 감독의 2003년 작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엠마 스톤이 주연으로 나섰다. 개막작에 선정된 이탈리아 감독 파울로 소렌티노 ‘라 그라치아’, 프랑스 감독 프랑수아 오종 ‘더 스트레인저’, 미국 감독 노아 바움벡 ‘제이 켈리’ 등 각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감독의 작품들도 눈에 띈다.
영화적 실험부터 넷플릭스 대작까지
올해 베니스에서 주목할 또 다른 지점은 넷플릭스의 침공이다. 칸이 극장 상영 규정을 앞세워 OTT영화를 초청 대상에서 배제한 것과 달리, 베니스는 굵직한 감독들이 넉넉한 제작비를 등에 업고 만든 넷플릭스의 수준급 영화들을 품으며 다양성을 더했다. 넷플릭스는 ‘프랑켄슈타인’을 포함해 경쟁 부문에만 세 편의 작품을 올렸다.

영화예술 본연의 맛을 느낄 라인업도 여전히 두텁다. 혁신성과 예술적 실험에 중점을 둔 오리종티 부문에 출품된 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 감독의 ‘마더’가 대표적이다. 197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한 복수 액션극으로, 대사를 줄이고 시각적 경험을 중심으로 설계한 실험적 작품인 폿시 폰치롤리 감독의 ‘모터 시티’도 흥미롭다.
이날 개막한 베니스 영화제는 다음달 6일까지 11일 간 리도섬 일대에서 펼쳐진다. 황금사자상 등 주요 부문 수상자를 가리는 시상식은 폐막식에서 발표된다.
베니스=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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