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베네치아 리도섬 해변을 따라 걷다 보면 ‘팔라조 델 시네마’(영화의 궁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매년 여름 끝 무렵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인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가장 극적인 무대가 된다. 거장 감독과 스타 배우들이 레드카펫을 밟고 전 세계 ‘시네필’과 만나는 영화제의 심장부이기 때문이다.
27일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가 막을 올린 팔라조 델 시네마엔 40여 개의 영화제 공식 참가국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걸렸다. 미국 프랑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요 영화 생산지인 만큼 매년 게양돼 왔지만, 이날 마주한 태극기는 예년보다 유난히 힘차게 펄럭였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경쟁 부문에 초청되면서다. 이날 박 감독이 레드카펫을 밟는 순간, 13년 만에 황금사자상 경쟁에 복귀한 한국 영화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깃발로 의미를 되찾은 것이다.
올해는 다르다. 한국 영화계의 이목이 온통 베니스영화제에 쏠리고 있다. 봉준호 감독과 함께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꼽히는 박 감독이 신작을 들고 베니스를 찾았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 새 주요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 수상은커녕 작품도 초청받지 못하며 ‘K영화’가 무너진다는 우려 속에서 들린 단비 같은 소식이다. 칸 영화제 단골손님이라 ‘깐느 박’이란 별칭이 붙은 박 감독이 ‘베니스 박’으로 변모한 것도 흥밋거리다. 박 감독이 베니스 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린 건 2005년 ‘친절한 금자씨’ 이후 20년 만이다.
박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인 ‘어쩔수가없다’는 미국 소설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도끼>를 원작 삼아 박 감독만의 영화적 미장센을 섞은 작품이다. 중년 회사원 만수(이병헌 분)가 덜컥 해고된 후 가족의 안정적인 생활을 지키려 재취업을 결심하고 구직 경쟁자를 제거하는 이야기가 얼개다. 오래전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애정을 쏟아 완성한 만큼, 베니스영화제도 눈여겨봤다. 알베르토 바르베라 영화제 예술감독은 앞서 “박찬욱은 올해 초청작 명단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감독”이라고 했다.
현지 기대도 상당하다. ‘어쩔수가없다’가 올해 영화제의 테마인 ‘괴물’과 어울린다는 점에서다. 앞서 바르베라 예술감독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올해의 영화제 ‘필 루즈(fil rouge·실마리)’는 괴물과 마주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어쩔수가없다’가 현대 사회의 보이지 않는 괴물을 은유했다는 점에서 경쟁작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테마에 부합한다는 관측이다.

경쟁은 만만치 않다. 올해 경쟁 부문 초청작은 21편이다. 이 중 황금사자상을 받은 경험이 있는 감독의 작품만 세 편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가 눈길을 끈다. 장준환 감독의 2003년 작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엠마 스톤이 주연으로 나섰다. 개막작에 선정된 이탈리아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 ‘라 그라치아’, 프랑스 감독 프랑수아 오종 ‘더 스트레인저’, 미국 감독 노아 바움벡 ‘제이 켈리’ 등 각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감독의 작품도 눈에 띈다.
이날 개막한 베니스영화제는 다음달 6일까지 11일간 리도섬 일대에서 펼쳐진다. 황금사자상 등 주요 부문 수상자는 폐막식에서 발표한다.
베네치아=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