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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빛을 품고 자신만의 소리를 만든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

입력 2025-09-04 15:43   수정 2025-09-04 15:44

공기조차 달궈져 피부 위에 끈적이게 내려앉은 8월의 한낮. 금호아트홀연세 주차장 출입구에 다다랐을 때 해를 등 뒤로 업은 채 누군가 트렁크를 끌며 걸어 들어왔다. 실루엣이 점점 선명해지자 최예은임을 알아차렸다.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며 놀라움과 반가움이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10대 때부터 봐 왔던 연주자였는데도 변함없는 모습과 분위기가 반가웠다. 그날 연주자는 리허설 시간에 맞춰 도착했고, 나는 미팅을 마치고 나가는 길이었다. 다시 아트홀 쪽으로 함께 발걸음을 옮기며 잠시 대화를 나눈 뒤 본공연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1988년생 최예은이 6세에 처음 접한 바이올린 소리는 마치 엄마의 목소리처럼 편안하게 들렸다고 인터뷰한 글이 생각난다. 어린 마음에서 이미 음악은 어머니의 숨결과 닮아 있었고 세월이 흘러 현실 속에서 독일 엄마 안네 조피 무터(Mutter, 독일어로 어머니)를 만나게 된 일은 그 편안한 소리가 실제 인연으로 이어진 것일까. 6세 소녀의 울림이 20년 만에 눈앞의 존재로 살아난 순간일까. 7세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여 김남윤 교수를 사사했고 10세에는 금호영재콘서트에 등장해 주목받았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악기 은행을 통해 1794년산 주세페 과다니니 크레모나 바이올린을 대여받아 사용했다. 이러한 지원은 최예은이 2002년(14세) 국제 영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 2003년(15세) 독일 레오폴트 모차르트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입상, 2006년(18세)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 2위 입상, 2006년(18세)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 등 국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데 큰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최근에는 금호문화재단의 <더 바이올리니스츠> 시리즈에 참여하여 우리가 우연히 만난 그날, 2025년 8월 7일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E♭장조’,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D단조’,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으로 피아니스트 김준형과 호흡을 맞춘 무대는 깊은 울림을 느끼게 했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느껴지는 격정과 내면의 갈등은 삶 속에서 마주하는 빛과 어둠의 순간과 닮았다. 어둠 속에서 빛을 등지고 들어오던 그 실루엣, 긴 터널 속 불안과 끝에서 갑작스레 맞이하는 빛의 안도감처럼 연주는 긴장과 해방 두 극단 사이로 안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예은과의 만남 역시 그러했다. 잠시의 긴장과 설렘 그리고 마주한 순간의 밝은 안도감이 한데 뒤섞이며 삶과 음악의 다이내믹한 공명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5일 뒤. 경복궁 근처 서촌에서 마스터클래스를 마친 최예은과 코다리찜 집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독일에서의 생활과 그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새삼 느껴졌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는 수많은 음악 전공 학생들의 공식 통계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음대 교수가 된 연주자의 이야기를 듣자니 궁금하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감 시간을 의식하지 못한 채 들어가 한 시간 만에 음식과 대화가 허겁지겁 흘러갔고. 이어 카페로 자리를 옮겨 또 한 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다. 모든 순간이 마치 타임랩스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음악 외에도 그녀 안에는 강단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겁내지 않고 헤쳐나가는 영리함과 용기가 돋보이는 친구였다.

트렁크를 들다가 손목에 이상을 느꼈지만 괜찮겠거니 하고 연주를 강행하던 중 몸이 보내는 신호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병원을 찾았고, 검사 중 다른 질환도 발견되어 한동안 바이올린을 잡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회복했을 때 지인의 연락으로 쾰른음대 교수 자리 오디션에 도전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고, 독일로 돌아가 무대에 올라서 연주를 마쳤고 인터뷰를 거쳐 2023년부터 쾰른음대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최예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던 중에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연주자에게 강제된 휴식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다. 끊임없이 연주하고 연습하며 무대 위에서 자신을 드러내던 삶이 잠시 정지될 때 비로소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요가 찾아온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며 삶과 음악을 하나로 바라보는 성찰의 시간이 된다. 음악은 이제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존재와 삶의 울림으로 확장된다. 멈춤 속에서 내면이 창조되고 성숙과 자유가 싹트며 연주자는 다시 무대에 서기 전 새로운 음과 호흡을 품게 된다. 이 강제된 휴식 속에서 내면과의 만남은 수전 손탁이 말한 사진 속 순간의 집중된 시간과 닮아 있다. 연습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생각에 잠긴 모습을 떠올리면 고요 속에 스며든 음악과 삶의 성찰을 한 컷의 사진으로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장의 이미지는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내면의 울림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기록이 될 것이다.

두 스승

앞서 언급했듯이 최예은은 세계적인 바이올린 여제 안네 조피 무터의 전폭적인 지원과 사랑을 받았다. 2004년 독일 라인가우 음악제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2005년 안네 조피 무터 서클 오브 프렌즈 재단의 후원 대상으로 선발되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1학년(18세)때 독일로 떠났다. 재단의 지원으로 1710년산 이탈리아 로제리 바이올린을 제공받고 유명 연주자들에게 레슨을 받으며 여러 페스티벌에서 연주 기회를 얻었고, 도이체그라모폰(DG) 음반 제작비까지 후원받아 국제무대에서 주목받는 아티스트로 성장하게 되었다.

무터와 최예은은 동시대 작곡가들의 현대 작품을 선보이며 실내악의 경계를 확장했고 위드만, 진은숙 등과의 협연을 통해 기존 클래식뿐 아니라 현대 음악에도 깊이 참여했다. 무터는 최예은에 대해 “음악적 감성과 대범한 기교를 인상적으로 조합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재능을 가진 연주자”라고 평가했다. 최예은 자신도 음악과 인생의 멘토를 만나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2004년부터 독일 뮌헨 국립음악극예술대학에서 안나 추마첸코(1945년생) 교수에게서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추마첸코의 음악적 깊이와 정서를 중시하는 가르침은 최예은에게 음악적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스승은 단순히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음악의 언어를 넘어 삶과 내면을 읽는 눈을 열어주는 존재다. 최예은에게 안네 조피 무터와 안나 추마첸코는 단순한 스승을 넘어 각기 다른 빛깔의 거울이자 길잡이였다. 무터는 음악 속 감정의 자유와 무대 위 존재의 당당함을 보여주었고, 추마첸코는 음악적 깊이와 정서의 섬세함을 일깨워 주었다. 한쪽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순간을, 다른 한쪽은 고요하게 흐르는 심연을 가르쳐 주었다. 제자는 이 두 빛을 품고 자신만의 음색을 만들어 간다. 멘토링은 기술이 아닌, 경험의 지도를 공유하는 행위이다. 스승이 걸어온 길과 겪은 시간을 간접적으로 통과하며 제자는 스스로 길을 헤쳐나갈 힘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음악은 단순한 소리에서 삶의 성찰로 확장된다. 안네 조피 무터와 함께한 유럽 투어는 스승과 제자가 만들어 내는 공명의 실천이자 음악과 인생이 맞닿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녀가 나아갈 길은 스승이 걸어온 길을 이어받아 또 다른 제자를 비추는 것이다. 자신이 받은 영감과 경험과 사랑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며 음악을 가르치는 일. 그 길 위에서 그녀의 손끝과 마음은 다시 한번 새로운 소리를 만들고 다음 세대를 위한 빛을 밝히리라 믿는다.



최예은의 경력은 화려하다. 많은 콩쿠르에서 수상한 것 외에도 2007년 미국 심포니 오케스트라 리그가 발표한 ‘주목할 만한 예술가’로 선정되었다.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켄트 나가노, 앨런 길버트, 앙드레 프레빈, 마이클 틸슨 토머스, 마리스 얀손스, 야닉 네제 세갱, 얍 판 츠베덴 등 세계 최고의 지휘자들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2013년 유럽 문화상 신인 연주상을 받고, 2014년 세계적 클래식 매니지먼트사 IMG 아티스츠와 계약을 맺었는데 이는 한국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서는 사라 장에 이어 두 번째였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022년 전속 계약을 맺어서 더 관심을 가지고 팬들이 지켜보는 그 매니지먼트사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는 연주와 음악적 예술에서 진정성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그는 실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완성된 개인적 관점이라는 진정성의 흔적이 없는 연주는 표식조차 결여된 것이라고 지적하며 음악가에게 외형적 기술보다 내면의 성찰과 경험이 깃든 진정성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빠른 발전과 많은 성과를 거두더라도 처음의 자세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깊게 다져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러한 태도는 음악을 넘어 사진, 아니 예술 전반에 그대로 통하는 자세일 것이다. 사진은 단순히 순간을 포착하는 기술이 아니라 그 순간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과 감각을 담는 예술이다. 빠른 성과와 완벽한 기법에 도달하려는 조급함은 오히려 사진의 숨결을 빼앗을 수도 있다. 아무리 화려한 구도와 뛰어난 해상력을 지녔다 해도 그 속에 작가의 숨결과 생각이 스며 있지 않다면 그 사진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 기술이 늘고 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더라도 처음 셔터를 눌렀을 때의 설렘과 호기심 그리고 피사체와의 진솔한 대화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자세이다.

그리고 나는 이 마음을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에게도 바란다. 빠른 성공과 외형적 찬사보다 연주 속에 스며드는 깊이와 진정성 그리고 처음 엄마의 숨결처럼 느꼈던 그 마음을 오래 지켜가기를. 그녀의 소리가 위대함보다, 가장 순수한 그때의 마음을 선택하는 길 위에 머물기를.

구본숙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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