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부유층 사이에서 유럽 원정 쇼핑 바람이 불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명품을 비롯한 고급 소비재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서, 가격 부담을 피하려는 소비자들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 매장을 직접 찾고 있는 것이다. 29일 CNBC 등 외신에 따르면 올 여름 미국인의 유럽 쇼핑 여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크게 늘었다. 여행사 엠바크 비욘드의 잭 에존 대표는 CNBC에 “파리, 밀라노, 마드리드는 전통적으로 패션과 액세서리 쇼핑의 성지로 꼽히지만, 최근 들어 미국 부유층 사이에서 관세 회피 목적의 여행 수요가 급증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 회사의 쇼핑 전용 여행 상품 판매는 전년 대비 48% 늘었다. 이는 지난 8월부터 유럽연합(EU)에서 수입되는 명품에 15% 관세가 붙은 영향이다. 고급 향수부터 자동차까지 폭넓게 적용돼 소비자들의 지갑을 직접 압박했다.
스위스도 상황은 비슷하다. 스위스는 EU 비회원국이지만, 미국으로부터 39%라는 초고율 관세를 부과받았다. 특히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스위스 시계 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여행 컨설턴트 에리카 재코위츠는 “스위스에서 시계를 직접 사려는 미국 소비자가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고객 중 한 명은 올겨울 스위스로 스키 여행을 떠나면서 파텍필립 ‘노틸러스’를 현지에서 구매할 계획을 세웠다. 미국 내에서 동일 제품을 사면 추가로 수 천만 원의 관세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관세 부담은 기업들의 전략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일부 시계 제작업체는 미국 수출을 아예 중단하고 “고객이 직접 찾아올 것”이라며 역으로 수요를 유럽 현지로 끌어들이고 있다. 미국 시장이 크지만 관세로 인한 판매 차질을 감수하기보다, 부유층 소비자들의 이동을 전제로 한 새로운 판매 모델을 택한 것이다.
다만 이런 ‘편법’이 마냥 통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세관 규정상 해외에서 구입한 상품은 귀국 시 반드시 신고해야 하며, 미신고 시 적발되면 추가 관세와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소비자들이 유럽을 찾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선 유럽 현지 명품 가격이 원래 미국보다 저렴하다. 여기에 부가가치세(VAT) 환급까지 더해지면 최대 15% 이상 환급을 받을 수 있어, 최종적으로는 미국에서 사는 것보다 여전히 이득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일부 소비자는 관세를 내더라도 유럽 구매가 더 저렴하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은 단순한 쇼핑을 넘어 글로벌 럭셔리 시장의 흐름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예고한다. 유럽은 관세 부담을 피하려는 미국인들의 소비가 늘어나면서 반사이익을 보고 있지만, 미국 내 명품 유통망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특히 스위스 시계처럼 고율의 관세가 붙은 품목은 아예 유통 질서가 재편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국 정부의 보호무역 조치가 글로벌 소비 패턴을 바꾸는 현장이 유럽 명품 매장에서 목격되고 있는 셈이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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