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엔 회장이었지만, 지금은 주방장이자 작가입니다.”
지난 4일 운동화에 면바지, 캐주얼 셔츠를 입은 노인이 서울 서촌의 한 북카페에 등장해 마이크를 잡자 70여명 참석자들이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두산그룹과 대한상공회의소 수장을 지낸 박용만 전 회장의 두 번째 신작 산문집 <지금이 쌓여서 피어나는 인생> 출간을 기념한 북콘서트 현장이다.
참석자들은 퇴근한 직장인, 지방 각지에서 온 주부, 학생, 자영업자 등 다양했다. 모두 사전 온라인 선착순 티켓 예약에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기자도 매진되기 직전 가까스로 티켓 2만원 결제에 성공해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번 신간은 박 전 회장이 4년 전 쓴 신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에 이은 두 번째 저서다. 인생 에피소드와 상념을 58개의 산문으로 정리했다. 이날 북콘서트 행사는 25년 전 두산의 신입사원이었던 임경선 소설가가 사회를 봤다. 스스로를 주방장이라고 소개한 것은, 재단법인 ‘같이 걷는 길’을 설립하고 5년 넘게 서울 강북 일대에서 하는 독거노인 반찬 배달 봉사를 두고 한 얘기다. 매주 월·목요일 아침 8시마다 모처에 마련한 주방에서 식재료를 직접 칼질한다.
박 전 회장은 “예전에는 비서에게 후원금을 입금하라고 하고 만족했는데, 어느 순간 이런 식의 후원은 담장 너머로 먹을 것을 던지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걸 찾은 게 음식을 만들고 배달하는 일이다. 박 회장 홀로 시작했던 반찬배달 일은 현재 함께하는 봉사자가 250여명에 달한다. 그는 “사실 받으시는 분보다 드리는 쪽이 훨씬 행복감을 느끼는 일”이라고 했다.
이날 북토크에 참석한 한 반찬배달 자원봉사자는 "저는 회사 대표 일로 바빠 한달에 한두번 참석할 뿐이지만 박 회장님은 월 8회 봉사를 어김없이 지킨다"고 전했다.
만 70세로 고희(古稀)의 나이에 접어든 박 전 회장이 동년배에 하고싶은 얘기도 있었다. 그는 “가난하던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내 자식에게 풍요를 물려준 것,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 세대가 더이상 보상을 생각하면 안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언제 40대 장관이나 대표, 병원장을 만들어본 적이나 있느냐”며 “과감하게 (권한을) 물려주지도 못하는데 무슨 낯으로 우리가 도전하라는 말을 하겠냐”고 말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식의 목표지상주의 사고방식도 더이상 사회와 조직을 지탱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제가 관찰한 경험상 절대 자리가 사람을 못 만듭니다. 시행착오는 오롯이 아랫사람의 몫이 되어버리고 말죠. 자리는 준비된 사람이 가야 합니다. 보스가 사운을 걸고 추진하라고 결론을 내면 그건 성역이 되고 용비어천가만 난무하는 조직이 될 겁니다. 그러다 그 조직은 침몰하게 되죠."

기업 문화도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봤다. 그는 “항상 도전적 목표를 제시하며 1등을 강조하는 방식이 우리 사회에서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며 “과거처럼 해서는 (조직의) 에너지를 끌어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 전 회장 자신도 성취를 위해 밤낮없이 달리다 번아웃을 겪고 퇴임 후 건강을 잃고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진 사례를 전했다.
30대 공무원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청중에겐 진지하게 대한상의 회장 시절 얘기를 꺼냈다. 핀테크 스타트업 규제를 해소하기 위해 분주했던 시절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국회 의원회관을 7㎞ 넘게 다니며 땀을 흘렸지만 여야의 무관심 속에 법 개정안이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적이 많다. 법 시행령을 만드는 공무원은 스타트업이 규제 하나 때문에 피가 마른다는 것을 꼭 알아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청중 가운데는 “재벌의 실물을 보고 싶어서 왔다”고 말해 좌중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는 덤덤하게 “아버지가 부자였지 내가 부자인 것은 아니다. 19살까지는 가정 환경 탓에 재벌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고 답했다. 동네 친구들과 평범한 삶을 살았고 이 때문에 '재벌의 아들' 이 아닌 미래의 불확실성을 똑같이 느끼는 청년으로 살았다는 것. 그는 "실제로 저를 대해본 사람은 부잣집 아들 같지 않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그의 '재벌 같지 않은' 평범했던 유년시절이 지금의 그를 봉사와 가톨릭 신앙, 작가로 노년을 가꾸는 삶으로 이끌었을 것이라고.
직장 동료들과의 인간관계, 뒷담화에 대한 고민을 토로한 청중에겐 ‘분노의 재고관리’ 비법을 전수했다. 박 전 회장은 “상대의 악행 리스트를 나만 보는 종이에 쭉 적어내려가다 보면 분노가 줄어드는 경험을 했다”고 했다.
"착한아이 컴플렉스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과감하게 미워하고 분노해야 합니다. 상처받게 한 그 사람을 버려내십시오. 내 실수가 팩트더라도 그 이야기를 남에게 나쁘게 전하는 사람은 의도 목적 모두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이건 70평생을 살아내며 얻은 저의 진리입니다."
북토크 참석자들은 기자에게 소감을 전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김헌주(56)씨는 "박 전 회장의 활동에 감동을 받고 왔다"며 "두산 회장일 때보다 지금이 더 사회에 파급력 높은 인물이 됐다"고 말했다. 전남 광주에서 건축가로 활동 중인 지연순(64)씨는 "진솔한 철학을 공유하고 싶어 일부러 서울에서 하는 북콘서트에 참여했다. 어떤 생각을 갖고있는지 직접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 전 회장은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젊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서 썼다. 제 인생이 지금의 3040 세대에게 큰 도움이 못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불킥 하고싶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면 후회는 딱 5분만 하세요. 되돌아가지 못하는 과거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가 후회스러울 때나 미래가 불안하다면 오늘을 열심히 살며 바꾸면 됩니다. 오늘이 쌓이면 미래가 바뀌고 잊고싶은 과거도 지워지게 됩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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