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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에서 해방된 무대, 관객이 각자 완성하는 '슬립 노 모어'

입력 2025-10-10 16:13   수정 2025-10-10 17:54

“더 이상 잠들지 못하리라! 맥베스가 잠을 죽였다(Sleep no more! Macbeth does murder sleep)”

논버벌(non-verbal) 공연 <슬립 노 모어>의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1623)에서 맥베스가 던컨 왕을 살해한 후 등장하는 대사를 차용한 것이다. 2003년 영국 공연 제작사 펀치 드렁크(Punchdrunk)가 런던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하나의 건물 전체를 무대로 삼아 관객이 배우를 자유롭게 따라다니면서 관람하는 방식인 ‘이머시브 씨어터(immersive theater)’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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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 영화의 미장센과 서스펜스를 반영

2011년 뉴욕, 2016년 상하이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 무대가 올해 8월 21일부터 서울 매키탄 호텔에서 개막했다. 매키탄 호텔은 한국 영화계의 상징이었던 충무로 대한극장(1958~2024)의 외관은 그대로 둔 채, 내부를 리모델링해 개조한 공간이다. 1930년대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총 5층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공간에서 <맥베스>의 기본 줄거리를 따라가며 열여덟 개 안팎의 각기 다른 스토리가 펼쳐진다. 특히, 이 작품은 원작의 셰익스피어 비극 구조에 머물지 않고,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의 미장센과 서스펜스 미학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1930년대 필름 누아르적 명암 대비, 관객을 관음증적 위치에 놓는 시선 장치, 사건의 전조를 알면서도 끝내 불안을 증폭시키는 서스펜스는 <레베카 (Rebecca)>, <싸이코 (Psycho)>, <이창 (Rear Window)> 등과 같은 히치콕의 전통과 깊게 맞닿아 있다.



대개 공연에서는 무대 위에 오른 배우가 희곡, 즉 텍스트에 따라 연기를 하고 관객은 동일한 시선으로 텍스트의 흐름을 따라가며 한 공간에서 다 함께 같은 사건들을 따라간다. 커튼콜이 끝나고, 공연에 대한 각 관객의 세부적인 감상이나 감정은 다를 수 있겠지만 모두가 동일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큰 감상의 틀은 고정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고정된 텍스트가 없다. 관객이 희곡을 보면서 ‘자발적으로 상상해야’하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이 공연에서 창작진의 상상력으로 구현된다. 각 층의 여러 공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텍스트가 진행되기 때문에 관객이 언제 극장으로 입장하는지에 따라, 누구를 따라가고 어떤 공간에서 시작하는지에 따라 관객은 자신만의 시선에서 ‘자신만의 텍스트’를 만들어낸다.

즉, 관객은 더 이상 작가의 이야기만을 읽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채워나간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가 말했듯 능동적인 선택과 해석을 통해 스스로 작품을 재구성하는 주체, 즉 해방된 관객으로서 자리하게 된다. 이에 같은 공연을 보고 나왔음에도, 관객들이 본 것은 서로 상이하며, 같은 작품을 본 것이 맞는지까지 의심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기에 어떤 인물을 쫓아갈 것인가를 관객이 선택하는 것부터가 ‘나만의 슬립 노 모어’를 만드는 시발점이다.

나만의 슬립 노모어를 만드는 경험

원작 <맥베스>는 맥베스와 맥베스 아내의 관점이 중심이다. 물론 메인 플롯인 맥베스-맥베스 부인 이외 서브플롯인 말콤-맥더프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작품의 가장 큰 사건은 ‘맥베스가 세 마녀의 예언에 따라 던컨 왕을 살해하는 것’이다. 이때 원작에서는 던컨 왕이 어떤 왕인지 거의 설명되고 있지 않으며, 던컨 왕이 시해당한 직후의 이야기 또한 언급되지 않는다. 이에 독자는 던컨 왕의 죽음 이후 작가에 의해 전개되는 맥베스의 행동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슬립 노 모어>에서는 인물들이 텍스트 속에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뚫고 나와 살아 움직인다. 작가가 독자에게 각 인물의 특정한 행위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에서 탈피해, 각 인물이 작가가 그들에게 집중하지 않는 순간에도 그들은 독자적으로 자신들만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주요 인물이 연회장에 있는 테이블에 모여 식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같은 내용이 세 번 반복된다. 대사 없이 움직임만으로 진행되는 논버벌 작품인 만큼, 기호화된 행동을 통해 관객은 작품의 줄거리를 알아나간다. 언어만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추상적인 구체성으로 인지하며 사건의 진행과 각 인물이 누구인지 파악한다.

여기서 가장 뚜렷하게 인지되는 것이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이다. 맥베스와 그의 대척점에 있는 던컨 왕을 따라가는 여정을 선택하면 작품은 관객에게 이렇게 다가온다. 맥베스는 아마도 이 작품에서 가장 바쁘게 행동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를 따라가는 관객 또한 끊임없이 그를 놓치지 않고 따라갈 체력이 필요하다.

은밀한 나체신, 관객들이 느끼는 충격

맥베스를 따라 움직이다 보면, 맥베스 부인과 필연적으로 만난다. 그들은 인간의 가장 사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인 침실에서 중상모략을 꾸민다. 맥베스의 입장에서 보이는 맥베스 부인은 뒤에서 조용히 맥베스를 조종하고 그가 적극적으로 왕을 살해하도록 부추기는 요녀다. 더불어 침실에서 나체로 등장하는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가장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엿본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관객은 극이 진행되거나 진행되지 않는 모든 공간에 존재한다. 그러나 인물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관객은 마치 유령처럼 이 공간을 떠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 가장 극대화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나체 장면일 것이다. 나체는 철저히 사적 허락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행위이기에, 관객은 침실 장면에서 침범된 은밀함의 충격을 체감한다.

맥베스를 따라다니는 동안에는 수많은 사건이 전개됨에 따라 숨소리가 가빠지고 시간이 굉장히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던컨 왕과 함께하는 순간 모든 것이 반대가 된다. 이미 한차례 맥베스의 시간을 향유했기 때문에 관객은 맥베스가 바쁘게 행동하고 있는 동일한 시간 선상에서 던컨 왕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일분일초가 바빴던 맥베스와 달리, 던컨 왕의 시간은 고요하고 평안하다. 심지어 그가 돌아다니는 공간도 한정적이다. 그는 여유롭게 술을 마시고, 면도 준비를 하며 무도회에 갈 준비를 한다. 아들이 그의 수염을 면도하는 순간의 시간은 특히 더욱더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의 마음에는 이 순간에도 맥베스는 그를 죽이려 온갖 행동을 하고 다니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이 몰려온다.



이후 무도회 장면에서 맥베스 부인과 춤을 추는 장면에서 맥베스와 던컨 왕의 시선 차이가 분명하다. 맥베스를 따라다닐 때, 그는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지 않고, 무도회장 위에서 자신의 부인과 끊임없이 시선을 마주하며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던컨 왕과 함께 무도회장에서 그 시간을 느끼면, 맥베스 부인이 맥베스와 시선을 나누는 것을 전혀 알 수 없다. 아무리 고개를 위로 들어서 맥베스를 찾으려 해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던컨 왕이 맥베스가 자신을 살해할 것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무도회가 끝나고 나서 맥베스 부인과 왕이 함께 왕의 사적인 공간으로 향한다. 이 장면에서 맥베스의 관점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였던 맥베스 부인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맥베스 부인은 왕을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것 같은 행위를 하면서 그에게 술을 건넨다. 그리고 그 술에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이 들어 있었다.

맥베스 부인이 퇴장하고, 혼자 남은 왕이 점차 괴로워한다. 그러다 침대에 누워서 그 고통이 극에 다른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맥베스에 의해 살해당한다. 분명, 맥베스를 따라서 그가 왕을 살해하는 장면을 이미 본 뒤이기 때문에 그가 어디서 등장할지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어떻게 해서 그곳에서 등장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럽다. 맥베스에게 왕의 죽음은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었지만, 던컨 왕에게 자신의 죽음은 너무나도 갑작스레 닥친 사고에 가깝다. 왕은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살해당한다. 그의 고통이 맥베스를 따라다녔을 때보다 더 강하게 다가온다. 원작에서 우리는 왕의 죽음 이후 그에게 일어난 사건은 알 수 없다. 왕을 죽이고 집으로 돌아간 맥베스의 이야기만을 알 뿐이다. 이 작품은 희곡에는 없던 그 이후의 이야기를 살인 사건 직후 여전히 왕의 곁에 남아있던 관객에게 제시한다.

갑작스러운 사건인가 사고인가

이렇게 관객은 자신이 선택한 인물의 시점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보게 된다. 이것을 일상생활에 대입하면, 주인공의 시점은 곧 우리 자신의 관점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으로, 시간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을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역지사지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타인의 시선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분명히 체감된다. ‘나’는 항상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이 작품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감히 모든 걸 다 안다고 자만하지 말라고. 절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다고 말이다.



한편, 인물의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을 돌아다니면 일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펼쳐지던 이야기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된다. 맥베스와 왕의 정권 다툼으로 혼란스럽고 시끄러웠던 정·재계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삶은 그저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조차 망각할 정도로 평안하다. 이는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을 읽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중심인물의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되기에 주변부의 인물 이야기는 그들이 중심인물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와 관계 맺을 때만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는 그렇지 않다. 주변부 인물은 각자 자신만의 시공간을 점유하며 행동하고 있다. 마치 일상생활에서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원작에서는 주변부 인물이었을지 몰라도, 이 작품에서는 중심인물과 동일한 선상에 놓이게 된다.

살아 움직이는 맥베스, 혹은 특정 인물을 눈앞에서 보면서, 그리고 그 인물을 바로 뒤에서 쫓아간다면 관객은 마치 자신이 그 인물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세 번째로 모인 연회장의 식탁에서 진행된 이야기의 결말은 더욱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감각된다. 특히 마지막 이야기가 진행될 때 맥베스를 따라다녔던 관객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눈앞에 직접적으로 펼쳐지는 그의 죽음에 곳곳에서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온 비명이 들린다. 그러나 여전히 맥베스는 관객과는 철저하게 분리된 한 명의 인물이자 타인이다. 그리고 맥베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관객은 ‘탐욕스러운 욕망의 결과’를 눈앞에서 똑똑히 보게 되며, 결말을 이미 아는 전지적인 시점을 가진 관객으로서 그의 그 행동을 질책할지도 모른다.

맥베스와 관객, 다른듯 닮은 모습

이 공연에서 모든 관객은 얼굴을 모두 가리는 하얀 가면을 쓰고, 말하지 않는 규칙을 따른다. 이에 개인은 철저하게 익명성을 보장받게 된다. 이때 하얀 가면의 형태는 과거 흑사병 의사들이 착용하던 부리 가면을 연상시킨다. 의사들이 착용한 부리 가면은 지금으로 치면 방독면의 일종으로, 공기로 전염되는 질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착용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관객에게 이 가면을 씌우는 것이 단순히 관객과 배우를 구분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 것이다. 관객은 하얀 가면을 씀으로써 배우들이 살아가는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그 영향을 받지 않도록 자신을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방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극소수의 관객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을 누리며 배우와 일대일로 이야기를 하거나 신체를 맞닿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들의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며, 단순하고도 바로 사라져 버리는 순간적인 만남이기에 여전히 관객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안전지대에 있다.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은 것이다.



더 나아가 ‘가면을 쓴 관객’은 익명성 뒤에 자신을 숨기게 된다. 인간은 타인과 직접적으로 얼굴을 마주 보지 않는 순간, 사회적인 체면을 지키려 연기하던 가장된 것은 옷을 벗고, 숨겨졌던 욕망과 같은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얼굴을 들게 된다. 얼굴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타인이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관객은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린 몇몇 관객들은 때때로 배우의 동선을 가로막거나, 다른 관객들을 밀치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맥베스가 좁은 통로로 뛰어가자, 관객들이 서로 먼저 가기 위해 서로를 짓누르고 밀면서 일시적인 혼잡이 일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왕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 맥베스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자신의 욕망 실현과 채움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는 모습이다. 즉, 맥베스는 우리와 다른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누군가를 짓밟고 갈 수 있는 무의식과 본능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작품이 ‘관객 참여 이머시브’라는 공연의 형태를 통해 진정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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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나고 맨델리 바(Manderley Bar)로 나와 재즈 공연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재즈 공연을 어느 정도 즐기고 호텔을 나와서도 작품의 잔향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얽히고설킨 장면과 감각들이 집에 돌아온 뒤에도 마음을 붙잡아, 쉽게 잠자리에 들 수 없게 만든다. 혹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가 모두 맥베스처럼 욕망에 사로잡힌 채 질주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던컨 왕을 죽인 뒤 잠들 수 없었던 맥베스처럼, <슬립 노 모어>는 관객마저 잠들지 못하게 한다.



김소정 뮤지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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