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행 현장에 남은 족적이 결정적 증거로 제시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60대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춘천재판부 형사1부(이은혜 부장판사)는 16일 A(60)씨의 살인 혐의 사건 선고 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핵심 증거인 '피 묻은 족적'과 피고인의 샌들이 일치한다며 A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지문, DNA 등 다른 보강 자료 없이 오로지 족적 감정만 있는 상황에서 족적 감정 결과만으로는 피고인을 범인으로 보기엔 부족해 보인다"며 원심과 달리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총 5번의 족적 감정 결과 3번의 감정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2번은 '양 족적 사이에 동일성을 인정할만한 개별적인 특징점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본 결과에 주목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교제하는 이성에게 강하게 집착했더라도 범행 동기로 보기엔 충분하지 않다"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족적 동일성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증명하는 대상은 피고인이 범행 전후로 이 사건 범행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는 것에 불과할 뿐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것은 아니다"라며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 중에는 이 사건 샌들의 족적과 다른 족적도 일부 발견돼 제삼자가 범행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영원 농민회 간사 피살 사건'은 20년 만에 사건 전모가 드러나는 듯 싶었다. A(당시 39세)씨는 2004년 8월 9일 오후 강원 영월군 영월읍 한 영농조합 사무실에서 영농조합 간부 B(당시 41세)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사건 직후엔 결정적 증거가 확보되지 않아 수사는 장기간 미궁에 빠졌었다. 그러다 20년 만에 사건 전모가 서서히 드러났다. 지난 2020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당시 사건 현장에서 확보한 족적과 사건 당시 유력 용의자였던 A씨의 족적이 99.9% 일치한다고 경찰에 통보하면서다.
경찰은 재수사를 시작했고, 같은 해 11월 A씨를 검찰에 송치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3년 7개월여에 걸친 보완 수사 끝에 A씨를 법정에 세웠다. A씨는 지난해 7월 구속기소 됐다.
수사기관은 A씨가 당시 30대 중반 여성 C씨와 교제 중이었으며, C씨가 영농조합법인 간사인 피해자 B씨를 '좋아한다'고 말하자 범행을 계획하고 알리바이도 만들었다고 판단했다.
경찰은 A씨가 C씨의 낙태 수술 비용을 2회 지불한 사실, PC와 휴대전화 디지털포렌식을 통한 C씨와의 성관계 영상 확보, C씨에게 전자우편으로 연애편지를 보냈던 사실을 파악해 치정에 의한 살인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A씨가 사건 발생 시각에 가족 등과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고 알리바이를 대며 용의선상에서 제외됐지만, A씨는 술을 사 오겠다며 계곡을 나와 B씨의 사무실로 이동해 범행을 저지른 뒤 계곡으로 복귀했다고 봤다.
한편 이날 항소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해 A씨는 곧바로 풀려났다. A씨는 "사필귀정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수사기관이 나를 추리소설 속에 살인자로 만들었다"며 "앞으로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숨진 피해자의 동생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라며 "국과수 감정 내용이 제일 정확한 데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국과수 존재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