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28일까지 이어지는 국립극단의 '섬X희곡X집'은 이러한 은유를 무대 위로 옮긴 이머시브(관객 몰입형) 공연이다. 무대는 서울역 뒤편, 빨간 지붕이 눈에 띄는 서계동 옛 국립극단 터 전체다. 관객은 이곳에서 '사이'라고 불리는 배우 8명을 따라다니며 청소년의 꿈과 사랑, 불안 등을 주제로 한 짧은 희곡을 마주한다. 자유롭게 공간을 탐험해도 좋다. 수많은 방, 심지어는 화장실에서도 위로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공연은 무대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방식을 뒤집은 색다른 체험으로 가득하다. 바닥에 이불이 깔린 공연장에 드러누워 배우가 들려주는 희곡에 귀를 기울이고, 클럽으로 변신한 분장실에선 평소라면 입지 않을 화려한 옷을 골라 또 다른 나로서 해방감을 맛본다. 교실로 꾸며진 방에선 책상에 엎드려야 희곡을 들을 수 있다. "난 사실 혼자 있는 걸 좋아해. 비밀 지켜줄 수 있지?" 책상 안에서 들려오는 은밀한 목소리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배우가 다가와 말을 건네기도 한다. 선택된 관객은 배우와 함께 희곡 텍스트를 읽으며 공연의 일부가 된다.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치도 곳곳에 숨어 있다. 한 장면을 보고 그 뒤에 이어질 희곡을 직접 써 내려가고, 수줍은 사랑 고백이 담긴 편지에 나만의 답장을 적을 수도 있다. 꾹꾹 눌러쓰는 만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공연이다.
이처럼 청소년기의 다양한 장면이 공연장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결국 "나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공감과 위로가 작품의 주제를 관통한다. 성인 관객에게도 그 시절의 상처와 고독을 돌아보게 한다.

이번 공연은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지난해까지 5년간의 개발을 거쳐 제작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청년 21명이 워크숍에 참여하며 제작에 도움을 줬다. 공연장에서 맞닥뜨리는 희곡 50여 편은 나수민 작가가 쓴 <누사 레시피>와 허선혜 작가의 <섬, 희곡집>에서 발췌한 것이다.
같은 이머시브 작품이지만 현재 충무로에서 공연 중인 '슬립 노 모어'와 주제와 형식 면에서 차이가 크다. '슬립 노 모어'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따라가며 서사를 좇아야 한다는 강박을 부여한다면 '섬X희곡X집'은 이런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호흡이 짧은 서로 다른 희곡이 분절돼 있기 때문이다. 다른 관객의 존재도 배우를 가까이서 보는 데 방해가 되는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시간을 나누는 '낯설지만 친밀한 친구'로 다가온다.

공연이 끝나면 잔잔한 온기가 남는다. '슬립 노 모어'가 쯔란 소스에 양꼬치를 찍어 먹을 때와 같은 중독적인 맛이라면, '섬X희곡X집'은 고소한 잣죽이 온몸에 따스하게 퍼지는 느낌이랄까. 희곡을 읽고, 쓰고, 듣고, 걷는 사이 관객의 마음을 잔잔히 어루만지는 치유의 공연이다.
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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