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빅파마가 ‘임상 허브’로 삼을 정도로 강력하던 한국의 임상시험 경쟁력이 규제 혁신과 지원 등의 부족으로 중국에 추월당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일섭 분당차병원 교수(글로벌임상시험센터장)는 9월 23일 열린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 25주년 기념 포럼에서 “예전에 우리가 중국보다 앞서 갔는데 이제는 절대 중국을 앞서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며 “이제는 중국을 돌아보면서 우리 정부가 좀 더 강력하게 지원을 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치료의 한계를 넘어, 글로벌 제약의 혁신이야기’를 주제로 글로벌 제약사들이 혁신 신약 개발을 통해 항암제, 백신, 항생제 등 필수의약품을 공급한 역사와 앞으로의 기술개발 전망에 대한 연사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또 혁신 신약 개발 과정에서 한국 임상시험의 역할과 환자가 받을 수 있는 혜택, 그리고 앞으로 국내 임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논의도 이뤄졌다.
국내 의료기관의 글로벌 혁신 신약 임상은 로슈의 표적항암제 허셉틴(성분명 트라스투주맙)에서 출발했다. 방영주 서울대병원 명예교수는 이날 첫 발표자로서 2005년 국내 최초로 글로벌 제약사의 표적항암제 임상에 참여하게 된 과정과 성과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 로슈는 24개국 584명의 HER2 양성 전이성 위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했는데 이때 한국도 임상 대상 국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HER2는 세포의 성장을 촉진하는 단백질로 암에서 생성돼 암세포가 증식, 분화하도록 한다. 당시 글로벌 임상이 성공하면서 유방암 표적항암제 허셉틴의 적응증에 HER2 과발현 진행성 위암이 추가됐다. 방 교수는 “허셉틴의 임상에 참여한 결과 이 같은 신약 임상이 참여 환자들의 질병 치료에 크게 도움이 되며 국내 임상이 신약 개발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지난 20년간 한국은 임상시험 강국으로 급성장했다. 2000년 5개에 불과했던 글로벌 임상시험 등록 건수는 2006년 100건을 넘겼고 2008년 216건, 2012년 303건, 2021년에는 421건을 기록했다. 임상 단계도 임상 3상 위주에서 초기 연구에서 데이터 수집의 중요성이 더 강한 1상, 2상의 비중이 점차 커졌다.
정부와 학계 차원의 지원도 지속됐다. 2008년에는 국가임상시험사업단이 출범하며 국내 임상시험 성장의 발판이 되었고 2012년부터는 서울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을 필두로 17개 병원이 임상시험글로벌선도센터로 지정됐다.
이일섭 교수는 “소수 다국적기업들이 한국을 임상시험 허브로 결정하고 인력을 충원했으며 병원들과 많은 MOU를 맺어 임상시험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일명 ‘빅5 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대병원·서울성모병원·서울아산병원·세브란스병원) 등 상급종합병원 상당수가 서울에 밀집해 있고, 환자 역시 이들 병원에 몰려 있으며, 이들 병원이 우수한 의료 연구진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으로 인해 국내 임상은 가파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로써 도시별 임상시험 승인실적에서 서울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 임상이 진행되지 못한 점, 2022년부터 EU 임상시험규정(CTR) 도입으로 인해 기관들이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이 맞물려 한국에서 진행되는 임상시험도 더욱 늘었다.
그러나 이처럼 뛰어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미 국내 임상은 제약바이오 시장에서 ‘파죽지세’로 부상한 중국에 따라잡혔다. 다른 유럽 선진국들도 자국 임상 강화를 위해 규제완화와 인센티브 제공에 적극 나서고 있다. 독일 정부는 자국 임상시험 환자 비중이 5%가 넘는 연구에 대해 약가 협상에서 프리미엄 가격을 적용할 수 있다는 기조를 발표했다.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에 따르면 한국의 글로벌 임상 점유율은 2023년 4위에서 지난해 6위로 내려앉았다. 서울도 임상시험 승인실적 도시 1위 자리를 베이징에 내줬다. 정부는 2030까지 한국을 글로벌 임상시험 3위 국가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규제완화, 심사 기간 단축, 분산형 임상 도입 등이 핵심 추진 전략이다.
이일섭 교수는 “규제 유연화 등 정부 차원의 지원 강화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지금은 임상시험 거버넌스를 다시 세우고 연구의 질에 집중할 때”라며 “다른 나라와 달리 일상 임상시험이 연구기관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제약업계도 연구기관에 컨설팅을 하는 등 국내 환경을 더 적극 활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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