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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백악관의 크립토 차르(AI & Crypto Czar) 데이비드 삭스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미국의 달러 패권과 국채 수요에 핵심적이라 강조했다. 트리핀 딜레마와 재정적자라는 미국의 두 문제를 스테이블코인이 풀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달러 스테이블코인 지원, 그리고 관련 규제 개혁을 국가적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월 행정명령으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중단하고 달러 스테이블코인 지원을 천명했다. 미 의회 역시 초당적으로 스테이블코인 기본법인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을 통과시켰다. 통화감독청(OCC)은 금융기관의 가상자산사업 진출을 공식적으로 허용했고, 연준(FRB)과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금융기관의 가상자산 사업에 대한 사전 승인 제도를 폐지했다. 오랜 기간 지속돼온 그림자 규제를 명시적으로 종료한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뱅크오브아메리카, JP모간, 씨티, 웰스파고 등 주요 은행들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비자, 마스터카드, 페이팔, 스트라이프 등 결제업체들 역시 스테이블코인 결제를 도입했고, 아마존, 월마트까지 상거래 대기업들도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나선 상태다.
아마존과 월마트의 연간 매출 6000억~7000억 달러 중 순이익은 300억~350억 달러로, 매출 대비 4~5% 수준이다. 결제에 필요한 금융비용만 150억 달러 선으로, 매출의 2%가 넘는다. 순이익의 절반 규모다. 이 비용을 절감하면 가격 경쟁력과 기업가치가 크게 개선된다. 또는 이 금액을 스테이블코인 도입 또는 발행에 투입할 수 있다. 만약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다면 담보수익도 추가 확보할 수 있다. 이처럼 스테이블코인 결제는 상거래 업체의 사업에 거대한 혁신이 될 수 있다.
지니어스 액트 통과를 전후해서 스테이블코인 특화 L1(메인넷) 네트워크들이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USDT 발행사 테더는 Stable, USDC 발행사 서클은 Arc, 스트라이프는 Tempo라는 자체 네트워크를 개발하고 있다. 과거에도 '이더리움 킬러'를 표방하는 수많은 네트워크가 쏟아져 나왔지만, 최근 시장 주도 기업들이 다시 자체 네트워크를 만드는 이유는 금융기관들의 스테이블코인 시장 진출이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이들 네트워크는 기관급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차별점을 두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및 탈중앙화 금융(DeFi) 생태계가 가장 잘 발달해 있는 이더리움 L1에서 처리하기 힘든 1초 이내 완결(finality), 높은 초당 거래 수(TPS), 거래수수료(가스비)를 없애거나 충분한 수준에서 낮추는 등 기존 ‘이더리움 킬러’들의 장점들을 계승하면서도 배치(batch) 처리, 자체 외환(FX) 엔진 등 기관급 고급 기능들을 탑재하고 있다.
더욱 눈길이 가는 부분은 규제 준수를 위해 거래의 투명성과 기밀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시도들이다. 그간 블록체인의 상식은 모든 거래(transaction)가 온체인 상에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것이었다. 쉽게 풀어 말하면, 누군가의 지갑 주소만 알면 그 지갑이 얼마를 가지고 있고 언제 누구에게 얼마를 보냈는지, 어떤 디파이(DeFi)에서 어떤 거래를 했는지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개인도 그렇지만, 금융기관이 이를 반길 리 없다. 보낸 지갑과 받는 지갑의 정보를 숨기는 블록체인도 일부 존재하지만, 이는 소위 ‘다크코인’으로 분류된다. 오래된 ‘다크코인’들은 자금세탁에 사용된 사례도 많다.
최근 만들어지고 있는 스테이블코인 특화 네트워크들은 거래 금액을 암호화하고 규제당국에만 읽기 전용 액세스 부여, 거래 세부 사항의 선택적 숨김, 프로토콜 수준에서의 트랜잭션 거부, 규제당국의 요청에 따라 자산 동결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금융기관의 규제 준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기능들을 탑재하고 있다. 믿을 수 있는 네트워크 검증자(validator)들만으로 네트워크를 운영하는 특징도 규제 준수의 일환으로 보인다.
범위를 넓히면 제도권 금융도 블록체인 도입을 본격화하고 있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는 자체 블록체인을 추진하고 있고, 미국 중앙증권예탁기관(DTCC)은 통합형 디지털자산 관리 플랫폼 Composer X를 내놨다. 구글은 금융기관용 블록체인인 GCUL(구글 클라우드 유니버설 레저)를 출시 예정이다. 솔라나는 빠른 처리 속도를 기반으로 ‘온체인 나스닥’을 표방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규제 완화와 지니어스 액트 발효로 법적 명확성이 확보됨과 동시에, 블록체인 업계는 금융기관의 스테이블코인 ‘매스어답션’을 준비하고 있다.
8년 전 ICO 열풍 때 나왔던 ‘금융 블록체인 혁명’이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 기술은 진보했고, 규제는 개선되었으며, 기존 금융망을 쓰던 기업들이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은행, 신용카드사, 결제 대행사에 지급하던 막대한 비용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제도권 금융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메이저 기관들도 변화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낙오할 수 있다.
‘금융 블록체인 혁명’은 이제 더 이상 블록체인 업계만의 ‘찻잔 속 태풍’이 아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금융은 어떻게 변할까. 글로벌 금융기관과 결제 사업자들이 직접 스테이블코인을 기관급으로 도입하면 세계인의 일상생활에 쓰이는 송금과 지급결제가 변화할 것이다. 더 나아가, 주식 등 금융자산 토큰화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선포한 ‘금융시장의 온체인화’가 진행되고 있다. 현금이 카드 결제와 온라인 송금으로 바뀌었듯이 전 세계 금융이 새롭게 재정의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걱정이다. 새 금융의 새 표준도 미국이 쥔다. 미국은 지니어스 액트로 스테이블코인의 법적 기준을 정립했고, 기술업계와 금융기관들은 규제를 준수하는 블록체인 인프라를 빠르게 구축하고 있다. 기관급 네트워크 일부는 이미 가동 중이고, 나머지도 곧 개발이 끝난다. 머지않은 미래에 미국산 스테이블코인과 네트워크들이 기존 금융망의 상당 부분을 대체할 것으로 보인다. 기존 은행망보다 빠르고, 싸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금융이 새로운 표준(norm)이 된 시대, 우리는 미국의 새로운 블록체인 금융망에 종속될 수도 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침투만 걱정할 일이 아니다. 미국의 국익에 맞게 만들어진 스테이블코인 특화 블록체인을 울며 겨자 먹기로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트럼프 행정부의 비현실적인 ‘500조 현금 요구’를 실시간으로 겪고 있기에 걱정을 떨치기 어렵다.
국내에는 대안이 없다. 스테이블코인 기본법 논의는 아직도 시작 단계이고, 국내 금융기관은 아직도 가상자산의 투자, 보유, 거래가 금지돼 있다. 2017년의 ‘가상화폐 긴급대책’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규제 준수 스테이블코인이나 인프라 구축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종속을 피하기 위해선 우리만의 대안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그 대안을 만들려는 시도조차 금지되어 있다.

김민승 코빗 리서치센터 연구위원은...
코빗 리서치센터 설립 멤버이자 연구위원이다. 블록체인과 가상자산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사건과 개념을 쉽게 풀어 알리고,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도록 돕는 일을 한다. 블록체인 프로젝트 전략 기획, 소프트웨어 개발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은 암호화폐 투자 뉴스레터 구독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소개한 외부 필진 칼럼이며 한국경제신문의 입장이 아닙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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