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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색은 붉은색일까 푸른색일까 [하태헌의 법정 밖 이야기]

입력 2025-10-13 10:38   수정 2025-10-13 10:39

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필자가 오래 전 법원에서 형사 재판을 맡고 있던 때의 일이다. 예닐곱 명이 함께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다 두 사람이 시비가 붙어 서로 병을 깨고 싸우면서 서로 다치게 한 사건이 있었다. 야간에 흉기를 휘둘러 상대방을 다치게 했으니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었다.

문제는 두 피고인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고 우기며 상반된 주장을 했다는 점이었다. 깨진 병과 핏자국, 난장판이 된 현장과 찢어진 상처는 명확했지만, 어떤 이유로 누가 먼저 폭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한 당사자들의 주장은 완전히 달랐다. 결국 노래방에 함께 있었던 일행 전원이 당시 상황을 밝히기 위해 법정에 증인으로 서게 됐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가. 분명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상황을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이 각자 달랐던 것이다. 누가 어디에 앉았는지, 누가 술을 따르고 마셨는지, 누가 노래를 했고 어떤 대화를 나눴으며, 누가 먼저 병을 깼는지 등 쉽게 헷갈릴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까지 극명하게 진술이 엇갈렸다.

누군가는 분명 위증을 하는 것이었겠지만, 그 자리에 없었던 판사로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기억은 생각보다 불완전하고 자신의 감정과 이해관계에 따라 재구성되기도 하는데, 송무를 하다 보면 이런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이럴 때마다 필자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전설적인 영화 <라쇼몽(라생문)>이 떠오른다. 전란으로 어지럽던 헤이안 시대, '라생문'의 처마 밑에서 한 스님이 최근 있었던 살인 사건을 이야기한다. 한 도적이 어느 무사를 포박한 뒤 그 아내를 겁탈했고, 그 무사는 칼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된 일이다. 사건 해결을 위해 도적과 아내, 무당의 입을 빌린 무사의 영혼, 목격자인 나무꾼의 증언이 이어진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 모두 사실관계가 조금씩 다르다. 사건의 진실은 하나인데, 자살인지 타살인지, 타살이라면 범인은 누구인지, 그 경위는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네 사람의 증언이 모두 그럴듯하지만 서로 모순돼 있다. 사건은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지게 된다. 앞서 언급한 형사 재판과 너무도 비슷한 상황 아닌가. '진실은 하나이지만, 보는 눈에 따라 진실은 달라진다'는 라쇼몽의 주제가 오늘날 법정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이 같은 '다중 진실'의 서사 구조는 장이모우 감독의 〈영웅〉에서 색채의 미학으로 한층 세련되게 발전한다. 혼란의 중국 전국 시대, 통일을 눈앞에 둔 진나라 왕은 늘 암살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무명(無名)이라는 무사가 왕 앞에 나타나 3명의 암살자를 처치했다며 붉은색 화면 아래 자신과 암살자들 사이의 이야기를 전한다. 하지만 왕은 의심을 품고, 푸른색 배경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재구성하며 반박한다. 이후 이어지는 장면마다 화자에 따라 붉은색, 녹색, 푸른색, 흰색, 검은색으로 화면의 색채가 바뀌며 인물의 감정과 시점이 전환된다.

상반된 이야기를 하는 화자별로 색채를 달리하는 기법은 당시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흥미롭게도 법정에선 이와 유사한 장면이 매일 펼쳐진다. 관행상 민사 소송에서 원고는 붉은색, 피고는 파란색 표지의 서면을 사용하는데, 무명과 왕의 이야기처럼 붉은 배경 위에 펼쳐지는 원고의 주장과 푸른 배경 아래 쏟아지는 피고의 주장은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경우가 많다. 이처럼 붉은 주장과 푸른 주장이 맞붙는 법정은 어쩌면 '영웅'의 미장센이 현실화된 공간일지 모른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제수알도 부팔리노의 소설 <그날 밤의 거짓말> 또한 흥미롭다. 국왕 암살 음모로 투옥된 4명의 사형수가 처형 전날 밤 '데카메론'의 한 장면처럼 각자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런데 각자의 이야기를 합쳐보면 결국 한 사람이 배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죄수를 가장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감옥장은 그 배후를 찾아내 처형한다.

하지만 제목이 암시하듯, 죄수들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모두 감옥장을 속이고 누군가를 배후로 몰아 제거하기 위해 의도된 거짓말이었다. 3명이 입을 맞추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의 고사처럼 반복된 거짓은 때로 진실을 이기기도 한다. 어떤 의도에서든 법정에서도 여러 사람이 한목소리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반복하면 의심스럽더라도 무시하긴 어렵기 마련이다.

소송 당사자가 진실만을 말하리라 기대할 순 없다.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은 강조하고 불리한 부분은 감추는 게 인지상정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선에서 발언을 적절히 조율하는 것은 변론의 중요 기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선을 넘어 당사자는 물론 선서를 한 증인까지 사실과 다른 말을 할 땐 이미 확정된 진실마저 흔들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대리인이 사건의 실체나 객관적 진실을 비교적 정확히 아는 경우라면 그 혼탁함은 더욱 깊게 다가온다. 그런 사안에서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나 증인을 보면 라쇼몽의 나무꾼처럼 혼란스러운 인간의 기억과 그날 밤의 거짓말 속 감옥장처럼 조작된 진실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재판의 목적은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다. 하지만 진실이 언제나 한 가지 색으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붉은 주장과 푸른 주장이 부딪히며 그 사이에서 수많은 중간색이 생겨난다. 재판은 그 색의 스펙트럼을 좁혀가는 과정이고, 그 길 위에서 판사는 착시를 이겨내고 진정한 색을 찾아야 한다. 재판부가 길을 잃지 않도록 주장과 증거를 정리해 선명한 색으로 드러나게 하는 일, 그것이 변호사의 몫일 것이다.

오늘도 필자는 의뢰인의 주장을 선명한 색으로 다듬으며, 이 색이 판사가 선택하는 진실의 색이길 기도한다. 내가 다듬은 색이 모두 진실일 순 없더라도, 적어도 적극적으로 진실의 색을 가리진 않는 것, 그것이 변호사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격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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