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7일 한국 일본 유럽연합(EU) 등을 거론하며 “미국으로 수천억달러, 심지어 조 단위 달러 자금이 들어오는 것이 공정하다”는 취지로 말했다. 한국 장관급 협상팀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 관세 협상을 한 지 하루 만에 나온 발언으로, 한국 측을 압박하는 취지로 해석됐다. 정부 안팎에선 오는 29일로 예상되는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관세 협상이 여전히 교착 상태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하던 중 무역 협상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우리는 중국에 아주 심하게 이용당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EU, 일본, 한국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공정하게 대우받는 것”이라며 “‘공정하게’라는 것은 미국으로 수천억달러, 심지어 조 단위 달러 자금이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날 발언은 전날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워싱턴DC에서 러트닉 장관과 만나 2시간가량 관세 협상을 벌인 뒤 나왔다. 한국이 약속한 대미 투자액 3500억달러는 ‘선불(up front)’로 내야 한다는 그간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과 궤를 같이한다. 김 정책실장은 협상 후 성과를 묻는 질문에 “2시간 동안 충분히 이야기했다”며 말을 아꼈다. 양국 장관급 추가 협상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에 정통한 관계자는 “한·미 관세 협상이 이제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에 달렸다고 얘기하기에는 이른 단계”라고 전했다.
양국 정부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29일 한국에서 열리는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 정상회담 전 관세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방한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날 계획도 재차 확인했다. 그는 “시 주석과 매우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며 “우리는 몇 주 뒤 한국에서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CNN방송 등 외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시아를 방문할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는 방안을 비공개로 논의해왔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방한 코앞인데…안 풀리는 관세협상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미국 현지에 남았지만, 추가 협상을 할지 여부는 미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 장관은 18일(현지시간) 조지아주의 LG에너지솔루션 공장 건설 현장 등을 방문한 후 한국시간으로 20일 오후 귀국할 예정이다.
이런 상황은 주말 협상 전 “10일 이내 결론이 날 것”(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 “가장 진지하고 건설적인 분위기에서 협상”(김용범 실장) 등 양국 고위 관계자들의 발언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한국 협상단은 이번 방미에서 3500억 달러(약480조원) 규모 대미 투자펀드의 구성안 등에 관해 한국 측 입장을 충분히 전달했지만, 현금 비중 등 핵심 사항에서는 여전히 평행선을 긋고 있다는 분석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양국 협상 직후인 17일에도 한국 등을 거론하며 “미국이 이들로부터 대규모 자금을 받는 게 공정한 것”이라고 거듭 주장한 것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협상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아직은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만 남은 상황은 아니다”고 전했다.
허정 한국국제통상학회장(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은 “미국이 외환시장 안정 방안에 ‘이해한다’며 양보 의사를 내비친 것에 화답하듯 한국도 현금 비중 등에서 일정 부분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며 “수익 배분 등 숫자에 매몰되기보다는 일본·유럽처럼 한국 기업들도 미국 내 직접투자와 현지 법인 설립을 늘려 재투자가 다시 한국 기업의 이익으로 환류되도록 하는 병행 전략을 세우는 게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내달 10일 제2차 ‘관세 휴전’ 만료를 앞두고 최근 또다시 격화된 미·중 갈등으로 한국 상황이 미국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미국 내에서도 한국과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미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의 마이클 로버츠 선임연구원은 최근 한 기고문에서 “불과 5년 전만 해도 전 세계 신규 선박 발주 시장에서 중국과 한국은 각각 37%의 점유율을 보였지만, 지난해엔 중국이 75%에 이른다”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동맹국과의 심층 협력 강화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
워싱턴=이상은 특파원/김리안 기자 selee@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