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파리의 거리는 산업과 예술의 열기로 들끓었다. 도시 재건으로 좁은 골목이 사라지고, 대로와 쇼윈도가 생겨났다. 기계가 원단과 실크 그리고 레이스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살롱에서는 보들레르의 시와 모네, 마네의 그림을 이야기했다. 예술과 산업 그리고 기술과 취향이 폭발적으로 교차하던 시대. 파리에서 패션은 더 이상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그러나 여성의 드레스만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화려했지만, 착용자보다 타인의 시선을 위한 장식물에 가까웠다. 이때 영국 출신의 재단사 찰스 프레데릭 워스가 파리에 등장했다. 실과 바늘로 드레스의 구조를 다시 짜고, 패션을 예술로 끌어올린 첫 디자이너. 그가 바로 찰스 프레데릭 워스였다.
그때는 사진이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되기 전이었다. 그 시대의 초상화는 지위와 품격을 상징하는 일종의 ‘사회적 초상’이었다. 옷은 패션이 아니라 ‘지위’였다. 귀부인들은 화가의 붓을 통해 자신이 속한 계급과 세련된 취향 그리고 시대의 이상미를 영원히 남기길 원했다.

'유제니 황후와 시녀들'(1855)은 그 정점이다. 햇살처럼 빛나는 실크 치마를 종모양으로 보이도록 풍성하게 부풀리게 해 허리를 잘록하게 한 크리놀린 드레스와 금실이 엮인 리본 장식. 이 그림은 19세기 패션의 기록이자 여성의 위신을 시각화한 도상(圖像)이었다. 빈터할터가 묘사한 드레스를 실제로 만든 사람이 바로 찰스 프레데릭 워스였다. 워스는 크리놀린 드레스와 버슬 드레스(스커트의 엉덩이 부분을 볼륨감 있게 부풀리는 버슬을 넣어 뒤태를 강조한 실루엣) 등 19세기 후반의 주요 패션 스타일을 유행시켰다.

그의 고객 명단은 곧 19세기 세계의 권력 지도였다. 프랑스 유제니 황후,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 러시아의 대공비들 그리고 미국의 사교계 여성 캐롤라인 애스터 등이 그의 고객이었다.
이들은 모두 워스의 드레스를 입는 것을 신분의 상징으로 여겼다. 워스는 옷으로 최상류층의 품위를 재단했다. 엄격한 복식 문화를 고집하던 궁정 사교계에 진출한 것은 그가 고급 패션의 지배자였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영국 출신으로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 워스는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각국과 신대륙의 고객들과 원활히 소통할 수 있었다. 이는 곧 그의 명성을 전 세계로 확장하는 결정적인 강점이 되었다.
그는 옷을 모델에게 입혀 살롱에서 공개했다. 당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이었다. 아내 마리에게 드레스를 입혀 귀부인들 앞에서 직접 걷게 했다. 이는 의상 시연이 아닌, 여성의 몸을 예술의 무대로 올린 것이었다. 오늘날 ‘패션쇼’의 원형이자 최초의 캣워크로 기록된다. 아내에게 관례를 깨고 어깨를 가리던 숄을 착용하지 않은 채 드레스를 입도록 해 사교계를 경악하게 만든 적도 있다. 당시 사교계의 모임 장소로 부상한 경마장에서 자신의 새로운 스타일을 소개하는 모험도 시도했을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워스는 드레스를 맞춤 제작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속에 예술적 개념을 담았다. 그가 디자인한 옷은 입는 이의 존재를 완성하는 작품이었다. 패션은 그의 손끝에서 처음으로 ‘예술’이라는 언어를 얻었다. 그때부터 패션 디자이너는 장인이 아닌 ‘예술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워스의 전성기는 이 무렵인 프랑스 제2 제정기(1852~1870년대)다. 그는 벨 에포크로 이어질 프랑스 패션의 미학적 기반을 닦았다. 그의 작품은 귀부인들의 초상화와 무도회, 파리 사교계의 중심에 섰다. 권력에 미를 입힌 사람이 워스였다.

그의 명성은 파리를 넘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닿았다. 그 무렵 뉴욕은 황금과 강철의 열기로 들끓던 신대륙의 심장이었다. HBO 드라마 '길디드 에이지'는 바로 그 찬란하고도 격정적인 시대를 정교하게 재현한다.
극 중 부유한 상류층 여성들이 입은 풍성한 버슬 드레스와 장식적인 오프숄더 가운은 모두 워스풍 실루엣의 계보 위에 있다. 뉴욕의 사교계에선 ‘워스에게서 옷을 맞췄다’라는 사실 하나로 신분을 증명했다. 오늘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V&A), 파리 갈리에라 패션 뮤지엄에 그의 드레스가 보존되어 있을 정도다. 그 속의 금사 자수, 자개단추 그리고 버슬 구조는 19세기 후반에서 벨 에포크로 이어진 여성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의 아틀리에는 디자이너·재단사·자수 장인들이 함께 일하며 예술과 기술이 교차하는 하나의 창의적 집단, 즉, 하우스가 되었다. 소수 고객을 위한 고급 맞춤복 또는 그것을 만드는 의상점을 뜻하는 ‘오트 쿠튀르’라는 단어도 이 무렵 워스로부터 시작됐다. 그래서 그를 ‘오트 쿠튀르의 아버지’라고도 한다.

그는 스무 명 남짓 직원으로 출발한 하우스를 1871년 1200명을 거느린 큰 사업으로 성장시켰다. 그의 아들 장 필립 워스가 하우스를 이어받았다. 그는 20세기 초까지 하우스 오브 워스를 운영하며 오트 쿠튀르의 정신을 계승했다. 이후 샤넬 디올 지방시 발렌시아가 같은 패션 하우스들이 워스의 발자취를 이어갔다. 이 모든 명품 하우스의 시작점이 프레데릭 워스였다. 워스는 파리 패션을 세계 패션의 리더로 성장하게 했고, 무엇보다 패션을 예술의 경지로 격상시켰다. 그가 ‘옷을 만든 사람이 아닌, 여성을 완성한 디자이너’로 불리는 이유다. 그가 남긴 바늘의 궤적은 여전히 런웨이 위를 걷고 있다.
민은미 칼럼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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