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여섯 시간 전쯤에 덜레스 공항에 들어와서 오후에 상무부에서 하워드 러트닉 장관과 면담했습니다. 상무부 안에서 한 시간 사십 오분 가량 있었는데, 대기시간 등을 고려하면 한 시간 반 정도 이야기하고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오늘 상황을 요약하자면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입니다. 김 실장이 상무부에서 면담이 끝나고 나오면서 한 발언이었는데요. 분명히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 결과물이 나오지 못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들어가기 전에 김 실장은 양국 간의 협상 진도가 꽤 마지막까지 와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16일 협상을 마치고 귀국할 때처럼 한두가지 쟁점을 빼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상당히 의견이 근접해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16일 협상 분위기와 관련해 “지난번에는 저녁도 함께 했고 네 시간 이상 같이 이야기했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한두가지 쟁점은 말하자면 이 모든 협상을 좌우할 수 있는 상당히 무거운 쟁점, 어찌 보면 그것이 전부에 가까운 쟁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 실장이 공항 입국하면서 설명한 내용도 그러했는데요. 김 실장은 “중요한 쟁점에 대해 각자 입장을 이야기하다 보면 갑자기 기존에 어느 정도 잠정적으로 합의했던 부분까지 연결돼서 후퇴할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다”고 표현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았을 때 결국 3500억달러의 투자 조건, 현금으로 투자하는 게 얼마나 될지, 또 일본처럼 3년 내에 할지 1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투자하겠다는 뜻인지 같은 부분에서 아직 이견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말하자면 이 딜이 트럼프 대통령의 표현대로 관세율을 ‘돈 주고 사는’ 것이라면, 나머지 조건에 대해서는 다 공감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가격이 결정이 안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지난 주 협상에서 이견이 쉽게 좁혀지지 않자 우리 협상단이 한국에 가서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관계부처 협의도 하고 다시 미국을 찾았고요. 오늘 한 시간 반 정도 추가로 우리 쪽 입장을 전달을 한 것입니다. 미국 측의 제안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지 우리 쪽의 마지노선을 다시 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 실장은 이날 입국할 때에도 “우리가 이번에 온 추가 주제에 대해 우리 입장을 미국이 조금 더 진지하게 이해해준다고 하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공은 미국으로 넘어 가 있습니다. 협상팀은 오늘 미국에 머물지 않고 바로 애틀랜타를 통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김 실장은 추가로 APEC 전에 다시 미국에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협상 상대방이 이미 여기 없는 것이 일차적인 이유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제 곧 아시아 순방을 시작하고, 이미 재무부의 베선트 장관이나 USTR의 그리어 대표 같은 경우에는 말레이시아로 오늘 향하기 때문인데요. 필요하면 미국 측과 화상으로 얘기를 더 할 수는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김 실장은 APEC 정상회의 때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만나니까 그 전에 타결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 “중요한 계기”라고만 답했습니다. 말하자면 APEC을 계기로 양국 정상이 합의에 이르기를 기대하고 노력하지만, 동시에 이견이 좁혀지지 않을 경우 억지로 하지는 않겠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번 관세협상과 관련해 월스트리트저널(WSJ) 사설 내용도 눈길을 끌었는데요. 한국과 일본의 대미 투자기금은 규모가 커서 실현 가능성도 낮지만, 이런 돈을 트럼프 대통령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한다는 구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위험성에 대한 비판이 미국 내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WSJ는 한국에서 3500억달러, 일본에서 5500억달러 투자를 받겠다는 이 계획이 통상적인 대미투자와 얼마나 다른지를 지적했습니다.
한국과는 아직 투자협정이 체결되지 않았지만, 일본은 이미 체결되었고 그 내용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를 들어 TSMC가 애리조나에 반도체 공장을 세운다, 이런 것과 달리 한 나라 정부가 다른 나라 정부에 투자하는 상당히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요.
각 투자 건마다 대통령이나 그가 지정한 관리자가 선택하고 통제하는 특수목적기구(SPV)를 설립하는 구조입니다. WSJ는 이것이 “의회의 예산 배정이나 입법 절차 없이 운영되는 사실상 국부펀드”라고 평가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기 정부 출범 직후부터 국부펀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틱톡 지분도 이런 펀드 안에 넣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부펀드가 아니라 경제안보펀드 등의 표현을 러트닉 장관은 쓰고 있는데요. 경제안보펀드든 국부펀드든 트럼프 대통령이 어디에 이 돈을 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WSJ는 이런 약속의 규모 자체가 너무 커서 실현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를 테면 일본의 대미투자 실행을 담당할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의 자산 규모는 350억달러에 불과한데요. 5500억달러 투자를 3년간 추진하기에는 턱없이 작은 규모입니다. 러트닉 장관은 이와 관련해서 일본이 MOU를 이행하려면 ‘대차대조표를 폭파’하고 막대한 차입을 해야 한다고 조언을 했는데요. WSJ는 이에 대해 “참으로 친절한 제안”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각국 정부가 유권자와 의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현실적인 장벽도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새로 임명된 일본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여소야대 정국에서 연립정부를 세워서 총리가 된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돈을 쉽게 내줄 수 없을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트럼프 대통령이 평소에 촉구해 온 대로 한국이나 일본에 국방비 지출을 늘리도록 하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제안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투자 구조는 정치적 부패로 이어질 여지가 크다고 강조했는데요. 굉장히 의미있게 들리는 대목입니다. 대통령에게 수천억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임의로 쓸 수 있게 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과 러트닉 장관이 “대통령과 공화당에 가까운 이들이 운영하는 사업에 투자하라는 엄청난 정치적 압박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WSJ는 또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인 관세조치를 이용해 양국 정부를 갈취하려고 한다며 “민주당 대통령이 이런 일을 했다면 공화당은 부당하다며 청문회를 열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는데요. “조만간 트럼프 투자기금도 마땅히 받아야 할 감시(청문회)를 받을 것”으로 전망했는데, 그럴 경우 우리 정부도 이에 대한 대응을 해야 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읽히는 사설이었습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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