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으르르르르렁!
으리으리한 저택 안, 두꺼운 나무 문 저편에서 무시무시한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집주인 부부를 비롯해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방 안에서 마치 갇혀 있는 맹수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그것의 정체는…. 집주인이 초대한 화가, 안토니오 리가부에(1899~1965)였습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뒤틀린 얼굴을 보며 맹수처럼 울부짖고, 동물의 몸짓을 흉내 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요.
독특하고 강렬한 화풍의 화가 리가부에는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20세기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이탈리아의 반 고흐’가 그의 별명입니다. 리가부에의 삶은 여러 편의 영화와 책으로 만들어졌고, 이탈리아 파르마에는 작품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도 있습니다. 2020년에는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히든 어웨이’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 경쟁 부문에 오르며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광과 대조적으로, 그는 삶의 대부분을 철저히 배척당하며 살았습니다. 미치광이, 짐승, 야만인이라고 불리면서요. 그는 어떤 사람이었고, 왜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야만 했을까요. 리가부에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데리고 있던 그는 여덟 달 뒤 자식이 없던 독일계 스위스인 부부에게 입양됐습니다. 자식을 간절히 원했던 양어머니는 리가부에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쏟아부었습니다. 하지만 양아버지는 허약하고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그를 무자비하게 학대했습니다. 양아버지가 그를 때리기 위해 벨트를 채찍처럼 휘두르는 소리는 리가부에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학교에서도 그는 놀림감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그의 괴상한 생김새와 행동을 놀려대면서 이상 행동은 더 심해졌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집에서 키우던 토끼들. 학교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는 토끼들과 끝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사람보다 동물을 더 좋아해요.” 양어머니의 불평에 양아버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인간보다 동물에 가까운 놈이니까.”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리가부에에게 동물들은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였습니다.
이상 행동을 거듭하던 그는 결국 아홉 살에 퇴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교사는 리가부에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회 부적응자.” 이후 여러 특수 교육 시설을 전전했지만, 늘 결과는 같았습니다. 3학년을 마치는 데 6년이 걸렸고, 정신질환은 갈수록 더 심해졌습니다. 급기야 그는 열여덟 살이던 1917년 극심한 발작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운명이 뒤바뀐 건 이 때였습니다.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해 마련된 붓과 물감을 본 게 계기였습니다. 리가부에가 갑자기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의사와 직원들은 경악했습니다. 그림의 색채와 모양이 너무나도 특이하고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리가부에가 가장 먼저 그린 것은 동물의 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눈은 짐승이 아닌 사람의 눈, 자신을 학대했던 양아버지와 선생님의 눈을 닮아 있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벌린 입과 날카로운 발톱을 그렸습니다. 삶을 위해 동물들이 투쟁하는 그 모습은 마치 리가부에 자신과 세상과의 싸움 같았습니다. 의사들이 물었습니다. “언제 그림을 배웠습니까? 누가 이렇게 동물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줬지요?” 리가부에는 답했습니다. “아무도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붓에서는 날아오르는 야생 독수리들이 튀어나왔습니다. 종이 위를 벗어나 달려 나가려는 듯한 고릴라가 나타났습니다. 분노로 몸이 부푼 호랑이가 생겨났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리가부에는 계속 으르렁거리며 쉭쉭 소리를 내고 이를 드러냈습니다. 의사는 진료 기록에 적었습니다. “문명화되지 않은 천재.” 그는 곧 정신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이 리가부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가부에를 낳은 친어머니는 그를 버린 후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이 때문에 스위스에서 나고 자란 리가부에는, 법적으로 이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스위스는 몰려드는 외국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위스 정부는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추방하기 시작했지요. 정신병력이 있는 리가부에도 그런 외국인으로 분류됐습니다. 결국 리가부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돈이 떨어진 리가부에는 마을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근처 강가의 버려진 오두막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나무 열매를 따 먹고 개구리와 물고기를 잡아 연명했습니다. 때로는 남의 채소밭을 뒤지거나, 너무 배가 고프면 날달걀을 훔쳐 먹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개와 토끼, 닭, 심지어 파충류까지 닥치는 대로 거둬들여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점차 인간과 동물의 중간쯤 되는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그만의 예술이 시작됐습니다. 리가부에는 강가의 진흙으로 조각을 만들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공 모양이었지만, 점점 모양은 정교한 동물로 변했습니다. 이전에 그림을 그렸을 때처럼, 조각을 할 때 그는 자신이 만드는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됐습니다. 말을 만들 때는 히힝거렸고, 개를 만들 때는 짖었고, 사자를 만들 때는 으르렁거렸습니다.
강변에는 리가부에가 만든 조각들이 하나둘 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이한 작품들을 본 마을 사람들은 적어도 리가부에가 해를 끼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리가부에에게는 ‘예술가’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아이들도 멀찍이서 그와 그의 오두막을 구경하곤 했습니다. 엘바라는 이름의 작은 소녀는 그중 하나였습니다. 말이 없었지만, 리가부에를 무서워하지 않던 유일한 아이였습니다. 토끼를 좋아했던 엘바는 그의 오두막까지 들어와 한참 동안 토끼를 쓰다듬다 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의 발길이 끊겼습니다. 얼마 뒤, 상복을 입은 여인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엘바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집에 불이 나 엘바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제발, 리가부에, 엘바의 초상화를 그려주세요. 당신은 엘바의 친구였잖아요. 물감값도, 작품값도 드릴게요.”

리가부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크고 맑은 눈을 가진 소녀를 그렸습니다. 천국에 있는 마을, 햇빛이 쏟아지는 꽃밭 옆에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림을 받아 든 엘바의 어머니는 초상화를 마을 광장에 걸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림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엘바가 살아있을 때 이런 느낌이었어.” 누군가 마을 출신의 유명 화가, 마리노 마차쿠라티를 데려와서 물었습니다. “잘 그린 그림이 맞습니까?” 그림을 찬찬히 살피던 마리노가 말했습니다. “이건 진정한 예술가의 작품입니다.”
다음 날 리가부에가 마을에 나갔을 때, 그를 조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 노인은 그를 향해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습니다. 리가부에는 그것이 존경의 표시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마을의 인정을 받은 그에게 또 한 번의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화가 마리노가 직접 오두막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나도 예술가입니다. 내 작업실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요?” 리가부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리가부에는 마을로 내려와 물었습니다. “그 화가 선생의 작업실이 어디요?” 1928년,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습니다.


마리노에게 유화를 배우면서 마침내 그의 내면에 갇혀 있던 야수들은 캔버스 위에서 자신만의 색과 형태로 포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그림을 구입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리가부에는 직업 예술가가 됐고, 마을의 구성원 중 하나로 완전히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리가부에의 나이도 40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장교가 히틀러를 위해 건배하던 순간, 술 취한 리가부에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습니다. 리가부에는 맥주병으로 독일 장교의 머리를 내리쳐 그를 기절시키고 말았습니다. 리가부에는 이 사건으로 정신병원에 4년이나 수감돼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정신과 의사 발렌티를 만났습니다. 발렌티는 리가부에의 예술을 존중했고, 그림 도구를 쥐여줬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 대화를 나눴습니다. 리가부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 고흐는 미쳤습니다. 그래서 위대했습니다. 나도 미쳤습니다. 그래서 위대합니다.” 한번은 깊은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두렵습니다. 내 안에는… 무언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발렌티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대신 당신에게는 예술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 선물입니다.”
그림을 그리며 리가부에는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그림에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가 스위스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캔버스 위에는 눈 덮인 알프스 봉우리와 목조 주택, 양 떼와 소들, 푸른 초원의 사슴들이 나타났습니다. 잊고 있던 유년 시절의 풍경이 기억 속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머지않아 그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했습니다.

그림의 완성도가 무르익으면서 리가부에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습니다. 1955년 곤차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61년에는 로마 국립 미술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돈도 꽤 벌었습니다.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도 제작됐습니다. 리가부에는 그 돈으로 여러 대의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샀습니다. 어디론가 질주하는 속도감이 좋았기 때문이었지요.
수많은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그의 발이 돼 줬지만, 내면은 여전히 공허했습니다.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인간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리가부에는 여관 주인 체사리나를 짝사랑했습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해 성에서 살고 싶다는 동화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그의 서툰 고백은 번번이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지만, 이 시기 그의 그림에는 평화와 사랑을 상징하는 성들이 들어섰습니다. 그렇게 리가부에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리가부에는 거짓말처럼 온순해졌습니다.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을 모두 잃은, 마치 이 세상에서 할 일을 다 마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요양원에서 조용히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는 일도 다시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1965년, 리가부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66세였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6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리가부에의 그림은 여전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멈춰 세웁니다. 작품에 난 발톱 자국 같은 붓질은, 불안하지만 순수했던 리가부에의 영혼이 세상과 충돌하며 남긴 흔적입니다.


그 솔직함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끌립니다. 계산 없는 순수한 진심이 가진 원초적인 힘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i>***이번 기사는 Beast in the Mirror: The Life of Outsider Artist Antonio Ligabue (Karin Kavelin Jones 지음), Fondazione & Archivio Antonio Ligabue di Parma(Google Arts&Culture) 자료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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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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